배낭메고 길나서다

천왕봉이 지켜보는 여정 - 2

대빈창 2011. 9. 26. 04:49

 

그후 채린엄마는 전북익산 여산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마치 선녀가 자식을 데리고 하늘로 올라갔듯이, 홀로 남겨진 소선생은 나뭇꾼처럼 관사생활을 시작했다. 주말이면 소선생은 어김없이 열차라는 동아줄을 타고 자신의 하늘인 전북 익산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선생을 통해 들은 바로는 여전히 채린은 거기서도 요란한 웃음소리로 분위기를 왁자지껄하게 만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경건하고 엄숙해야 할 교회 분위기를 이끄는 제 어미를 가끔 난처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동생 예린은 어미닭 품을 벗어난 병아리의 호기심으로 언니를 따라 바깥세상에 맛을 들여 연일 세탁기를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게 했다.

나는 녀석들의 독특한 표정을 떠올리며 열차에 올랐다. 4호차 특실로서 좌석번호는 3번으로 창쪽이었다. 말하자면 열차의 진행방향으로 맨 앞좌석이었다. 고작 2시간 30분거리의 열차여행을 특실로서 예매한 것은 단순히 입석승객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안하게 책에 눈길을 주거나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을 구애됨이 없이 실컷 포식하고 싶었다. 하지만 알량한 나의 계산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맨 앞자리라 제법 넓은 공간인데도 짐보따리가 빼곡히 들어찼고, 몸빼를 입은 할머니 두분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작해야 출발점인 서울역을 떠나 두번째 역인데도 할머니 두분이 그것도 특실좌석 남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마 할머니들은 일반실과 특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입석표로 좌석주인이 올때까지 자리를 보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번호표를 확인하고 짐칸에 배낭을 올려놓자, 할머니들은 동시에, “이 자리유~”하는 아쉬움이 짙게 배인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와 함께 엉거주춤 일어섰다.

통로로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는 두 노인네는 얼핏 보기에도 다리가 불편했다. 할머니들의 목적지는 논산이었다. 나는 할수없이 노인네들의 짐보따리를 짐칸에 올려 공간을 마련했다. 그리고 창쪽 턱받이에 엉덩이를 걸치고 ‘주강현의 우리문화기행’을 펴 들었다. 두 노인네는 자리를 차지한 것이 못내 미안했던지 몇개의 역을 지나칠때마다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다리 불편한 두 할머니를 옆에 세워두고 젊은 놈이 창밖 풍경이나 감상한다는 것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싹수가 없는 짖거리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기도 하지만 특실에는 입석승객이 들어올 수 없어 통로에 서 있다가는 영락없이 검표원에 의해 일반실로 내몰릴 수 밖에 없다. 턱받이에 앉아있는 나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검표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나는 간신히 예외적으로 특실 입석승객이 될 수 있었다.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드디어 논산역. 짐칸의 짐보따리를 내리는 나에게 할머니들은 굳은 허리를 연신 굽히며 고마워했다. 이제 편하게 여정을 시작해야지. 나는 좌석 등받이에 허리를 깊숙히 묻고 책을 펴들었다. 웬걸, ‘다음역은 강경입니다. 내리실 분은 잊으신 물건...’하는 스피커 소리가 고막을 파고 들었다. 나는 어이없게도 충청도와 전라도라는, 도단위로 지리적 거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논산과 강경은 아주 짧은 거리에 바로 이웃해 있었다.

배낭을 추스리면서 나는 과연 소선생이 마중나와 있을까하는 염려와 함께 침목을 건너 대합실로 들어섰다. 기우였다. 소선생은 예의 수수한 옷차림새로 얼굴가득 웃음을 띠운채 나를 반겨주었다. 소선생은 미리 준비한 자가용으로 비산비야를 가로 지르는 국도를 내달렸다. 여산교회 마당에 차가 세워지자 나는 은근히 화장실을 찾으면서, 교회입구 슈퍼마켓에 들러 자매에게 안길 선물세트를 마련했다. 두 녀석은 한참이나 세트를 각개분산시키며 자기몫을 챙긴다. 채린은 예의 붙임성으로 근 반년만에 만나는 나를 알아보고 품안에 안기고, 예린은 어느새 안정된 걸음걸이로 마당으로 내려섰다. 늦은 점심을 먹고, 소선생 가족과 나는 익산 미륵사지로 향했다.  

나는 차를 타고 가면서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얼어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네.-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려있는, 백제 무왕이 신라 진평왕의 세째딸 선화공주를 꼬이기 위해 지어낸 서동요을 떠올렸다. 무왕은 왕위에 오르고서 자신의 본거지인 금마의 용화산밑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별궁을 두었다. 절터 발굴 결과 법당과 회랑이 높은 주춧돌로 받쳐있어 삼국유사에 전해오는대로 연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했다는 설화가 사실로 입증되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