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거꾸로 보는 고대사
지은이 : 박노자
펴낸곳 : 한겨레출판
내가 알고 있는 이 땅의 대표적 좌파 논객은 홍세화, 김규항이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 책으로 접하게 된 박노자를 가장 윗길에 놓아야겠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되새김글의 모두다. 저자는 한국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통해 진보논객으로 독자에게 깊이 인식되었다. 하지만 박노자의 본령은 한국고대사다. 그의 박사논문은 ‘5세기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이다. 러시아 최초·최후의 가야학박사일 것이다. 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망한 직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러시아 문학기행을 떠났다. 그때 일행의 가이드를 맡은 러시아인이 바로 오늘날의 박노자였다. 자기 전공분야인 가야의 역사를 묻는 벽안의 이방 청년에게서 이 땅의 지식인 작가들은 얼마큼의 당혹감을 느꼈을까.(내가 즐겨 찾는 블로그 야매댄서의 글을 참고했다) 그때나 이제나 고대 가야는 이 땅에서 찬밥신세이기는 마찬가지다.
책은 고조선에서 통일신라까지의 역사를 민족주의 사학, 즉 ‘위대했던 고대사’에서 벗어나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는 글 28편이 4부에 나뉘어 실려 있다. 현대 한국인들은 '정치의식이나 문화, 언어가 동질화된 집단'으로서 하나의 민족이다. 하지만 이 땅에 살았던 고대인들인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한 민족이기보다는 '공동기원에 대한 집단적 인식이나 공동의 종교, 가치 등을 기반'으로 한 종족으로 보아야 제대로 된 고대사를 정립할 수 있다.
지금은 온 세상 사람들을 국적별로 구분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19세기 초반 유럽에서 배타적 국적법이 성립하기 전에는 오늘날의 의미의 ‘국적’은 없었다. 즉 종족이 다양하고 일상언어가 표준화돼있지 않던 고대인들에게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전통시대 역사의 부적절한 근대주의적 해석’은 개화기나 일제시대 국권이 침탈당하는 시기의 신채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욕망이 투영된 해석을 현재적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수난당하는 근대사’는 ‘위대한 고대사’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스라엘 민족의 나찌의 홀로코스트 수난사는 고대의 다윗, 솔로몬 고대왕국을 창조하고 현대의 팽창적 야망(팔레스타인 점령과 학살)을 부추긴다. 만주를 호령한 위대한 고구려의 후예는 아류제국주의로 열등(?)한 민족인 동남아인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초국적기업 삼성에 열광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으로서 오천년 이래 한번도 남의 땅을 침략한 적이 없었다는 제국주의의 희생자인 평화의 민족이 돌연 ‘제국’의 광풍에 휩싸였다.
사극 열풍을 보라! 고구려 - 주몽, 태왕사신기, 자명고, 광개토태왕. 신라 - 선덕여왕, 미실. 백제 - 근초고왕. 고려 - 태조 왕건, 제국의 아침. 가야 - 김수로 까지. 요즘 김진명의 판타지소설 ‘고구려’가 필명을 휘날리고 있지지 않은가. 드디어 한민족이 세계를 호령하는 개벽의 시대가 열린 것인가. ‘무기의 그늘 ’로 ‘더러운 전쟁’인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벌인 제국주의적 탐욕을 드러낸 대표적 진보작가인 황석영마저 MB정권에서 ‘유라시아 문화대사’를 역임하겠다고 나섰다. 노르웨이 테러 용의자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모범국가로 대한민국을 꼽았다. 같은 혈통의 국가, 단일문화국가, 병영국가, 무한경쟁에 올인해 탈락자들이 자살로 내몰리는 국가 대한민국은 당연히 유럽 극우주의자들의 이상향이 될 수밖에 없다.
평소 논바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촌로들이 때만되면 군복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이 땅은 그들에게 천국인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북한, 중국 조선족, 소련 고려인은 대한민국 국민이 될 수 없으나, 비한민족 인구의 비율은 계속 늘어나는 것이 현재의 ‘우리 역사’다. 여기서 저자는 다문화 상생사회와 동아시아 공동체가 우리의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여기서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동해·독도 도발에 대한 모범답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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