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름 : 고뇌의 원근법
지은이 : 서경식
옮긴이 : 박소현
펴낸곳 : 돌베개
나의 독서여정에서 비중이 큰 저자들 가운데 한분이 디아스포라diaspora 지식인 서경식(徐京植, 1951-2023)이었다. 나에게 스무권째 책이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청춘의 사신死神』에 이은 세 번째 서양 근대미술 기행 에세이였다. 앞의 두 권이 ‘예술작품을 관통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인간들의 삶과 결단의 순간’들에 닿는 것이라면, 책은 ‘미학주의가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회의와 반론이 근저’를 이루었다.
『고뇌의 원근법』은 2부에 나누어 6장으로 구성되었다. 1부 1장 ‘통일 독일 기행’은 1990년대 통일 독일을 찾은 저자가 동독지역 미술관을 관심 있게 둘러보았다. 유틀란트 반도 제뵐의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 미술관. 무너진 형태와 격렬한 색채로 농후한 감정 표현, 아홉 점의 《그리스도의 생애》 연작 1911-12년. 땅이나 땀의 냄새가 배어나는 농민과 어민의 모습으로 그린 〈그리스도의 매장〉 1915년. 에밀 놀데는 나치에 영합하지 않고 예술표현상의 타협을 거부.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는 1905년 드레스덴에서 예술집단 ‘다리파’ 결성. 고전적 아카데미즘을 거부하고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지향해 형태가 색채의 직접성을 기초로 내적인 인상을 그린 〈군인으로서의 자화상〉 1915년. 헨드리크 테르부뤼헨(Hendrick Ter Brugghen, 1588-1629)의 〈성 베드로의 해방〉 1624년은 1604년경 이탈리아 로마에 10년간 머물면서 당시 절정기의 카라바조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
2장 ‘너의 눈을 믿어라!―오토 딕스와 그의 시대’는 책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글로 1·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에서 작품 활동을 한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를 다루었다. 드레스덴주립미술관의 전쟁에 의한 파괴와 살육의 현실을 거부감이 들 정도로 남김없이 그려서 보여 준 전쟁제단화 〈전쟁〉 1929-32년. 전체 폭이 4미터8센티미터, 높이가 2미터64센티미터의 대작. 인간의 본능이나 욕망에 대해 솔직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낸 〈늙은 연인들〉 1923년. 프랑스 페론의 대전박물관, 동판화 《전쟁》 시리즈 1924년. 병사들이 전후에 사회로부터 냉랭한 대접을 받는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한 〈상이군인〉 1920년. 구걸하고 있는 상이군인 〈프라하 거리〉 1920년. 성냥팔이 장님 상이군이 〈성냥팔이〉 1920년. 매춘부를 그린 신랄한 비평정신 〈모피 위의 여성〉 1926년. 전쟁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굴욕 〈여성반신상〉 1926년. 나치의 신경을 거스르며 곤두서게 하는 도전장으로 그린 〈7대죄〉 1933년. 오토 딕스의 예술은 전쟁의 잔혹함에 대한 증언,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증언, 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저항의 증언. 국내 망명의 길을 택했던 딕스는 자기 자신의 눈을 무기로 한 화가가 어떤 단체나 조직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계 전쟁의 세기에 맞섰다.
3장 ‘증언으로서의 예술―누가 펠릭스 누스바움(Felix Nussbaum, 1904-1944)을 아는가’는 유대인 화가로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친 누스바움의 작품을 이야기했다. 표지그림 〈사형복을 입은 자화상〉 1942년. 유대교 예배를 위한 숄을 뒤집어 쓴 두 명 중 오른편의 젊은이가 화가의 자화상, 초기 대표작 〈두 명의 유대인〉 1926년. 1931년 ‘베를린분리파전’에 출품한 〈멋진 광장〉 1931년. 남프랑스 수용소에 감금된 시절 〈생시프리앵 수용소에서 열쇠를 쥔 자화상〉 1941년. 1942년 게슈타표의 감시를 피해 벨기에 브뤼셀에 은거, 〈유대인 증명서를 쥔 자화상〉 1943년. 최후의 작품 〈죽음의 승리〉 1944년은 세계전쟁과 ‘홀로코스트’의 시대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를 그렸다.
2부 4장 ‘문을 열어젖히는 자―〈토마스의 불신〉에 관하여’는 근대회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카라바조(Caravaggio, 1571-1610)의 그림을 다루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여성화가 헨드리크 테르브뤼헬(Hendrick Ter Brugghen, 1588-1629)의 술의 신인 바쿠스를 옆에서 시중드는 무녀 바칸티를 그린 〈원숭이가 있는 여성상〉 1627년. 부활한 예수를 만난 토마스가 예수의 성흔에 손가락을 넣은 장면을 그린 카라바조의 〈토마스의 불신〉 1600-01년. 신의 복음을 시각화하는 것을 유일한 사명으로 여겼던 화공과 화가들이 머지않아 보고 그리는 욕망 자체의 쾌락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5장 ‘고뇌의 원근법―고흐에 관한 대담’은 자본주의 세계에서 예술가로 살기 위해 겪어야하는 고뇌의 원형을 보여준 화가 고흐에 대한 대담이다. 대담의 주제는 ‘지금 고흐를 말하다’. 2001년 5월 12일 일본 도쿄 화랑 ‘세션하우스’에서 열린 공개강좌 때 진행. 대담자는 화가 야노 시즈아키矢野靜明(1955- ). 1881-1890년까지 그려진 그림들, 즉 고흐가 화가가 되려고 결심한 때로부터 10년 정도 사이에 그린 그림들의 공통점은 멀어져가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 고흐의 풍경 속에는 잠재적이긴 하나 멀어져가는 감각의 모티프가 있다.
6장 ‘학살과 예술―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라사르의 천사들’은 과테말라 원주민 학살을 증언하는 사진작가 다니엘 에르난데스 살라사르(Daniel Hernándaz-Salazar, 1956- ) 의 사진 작품을 토대로 학살과 예술의 관계를 묻는다. 과테말라는 내전에 의한 학살이 36년간 계속되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 서경식은 일본어판 작품집 『과테말라 어느 천사의 기록』에 추천글 ‘원숭이의 불길한 목소리’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