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가 지난 며칠 뒤 저는 참으로 오랜만에 김포 통진의 옛집을 찾았습니다. 옛집에서 주문도로 이사 온 지가 만 3년이 다 되었습니다. 왼편 2층 건물이 마을회관입니다. 평소와 다르게 회관은 적요했습니다. 농한기의 짬으로 어르신네들이 재미삼아 두드리던 고스톱이나 마작으로 밤낮없이 시끌벅적했던 곳입니다. 오른편 모퉁이가 보이는 처마 낮은 파란 슬레이트 지붕은 돼지우리입니다. 용케 ‘덕화공영’이라는 글자가 햇빛에 바랜 가빠가 걸쳐 있습니다. 10여년도 넘는 저 세월 건너 어느 날이 떠오릅니다. 한여름의 뙤약볕이 어미 젖꼭지에 매달린 새끼돼지들의 흰 잔등을 달구는 것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불현 듯 어디선가 얻어와 햇빛 가리개 차양으로 쳤습니다. 텃밭에는 배추와 쪽파가 심겨졌습니다. 국유지라 개발의 광풍을 피할 수 있었던 자투리땅입니다. 수십 년 동안 어머니의 잔손질이 머무르면서 가난한 가족의 식단을 책임져 주었습니다. 이사를 오면서 이웃사촌에게 경작권을 넘겨주어 그나마 콘크리트 범벅을 피했습니다. 바람결에 묻어 온 소문처럼 우리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잡풀만 우거졌습니다. 집에 전기를 끌어오던 전봇대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마을회관을 에워 쌓듯이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흙더미 너머로 펌프 카가 보이고, 아파트 군락이 척후병처럼 서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뭉게구름이 떠 있는 파란 가을하늘 아래 아파트만 무성히 키를 늘일 것입니다. ‘신일 해피트리’ 아파트입니다. 화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던 농촌공동체는 산산이 붕괴되었습니다. 몇 가구는 저 ‘해피’한 아파트로 거주를 옮겼고, 또 몇몇은 대처의 자식들네로 살림을 옮겼습니다. ‘한강 신도시’라는 개발 바람이 불면서 마을 주민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철거민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마을이 깔고 앉은 대부분의 땅은 한 사람의 소유였습니다. 이사비로 수백만 원을 손에 쥔 촌로들은 어쩔수없이 마을을 떠났습니다. 자본과 권력은 손도 안대고 코를 풀었습니다. 달동네 철거민처럼 용역 깡패를 살 필요도 없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경찰이 깡패와 합작해 자본을 위해 노골적으로 몽둥이를 휘둘러도 아무 탈이 없는 나라에서 촌무지렁이들은 알아서 물러나주니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박노자의 말대로 5%의 재벌과 부자들의 이익을 위해 온갖 설레발을 치는 국가는 민중에게 폭력기구에 다름 아닙니다. GDP 3만달러가 되면 복지사회가 구현된다는데, 말라비틀어진 '고향'이라는 낭만적 감상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당신의 고향은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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