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천년의 바람
지은이 : 박재삼
펴낸곳 : 민음사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아, 보아라 보아라/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사람아 사람아/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탐을 내는 사람아.
표제시 ‘천년의 바람’(68쪽)의 전문이다. 나는 이 시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기를 간절히 부탁하는 시인의 하소연으로 들렸다. 물질문명의 탐욕에 사로 잡혀 스스로의 말로를 재촉하는 묵시록적인 상황을 깨우치라는 시인의 음성으로 말이다. 지나치게 탐을 내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바람의 장난’은 장난으로 그치질 않았다. 허리케인의 강도는 인간의 문명을 비웃듯 ‘뉴올리안즈’라는 도시를 지구상의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해가 갈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태풍 앞에 우두망찰 넋을 놓으면서도 인간은 또다시 바쁘게 바벨탑을 열심히 쌓는다. 후쿠시마 피폭으로 일본 열도가 방사능 공황에 빠졌는데, 안전을 강화한다는 구호아래 이 땅은 핵발전소 건설에 채찍을 가한다. 도대체 반성할 줄 모르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오만함에 신은 자기임무를 망각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80년대 중반. 철부지의 낭만적 감상으로 막장을 찾았으나, 껄렁한 행색으로 퇴짜를 맞은 나는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1년 세월을 허송하다 하릴없이 캠퍼스에 돌아 온 나이 먹은 복학생이었다. 화사함 봄날. 재미없는 강의에 시큰둥하며 등나무 벤치에 등을 기대고 노닥거리다 창비 영인본을 만났다. 신기루마냥 피어오르던 아지랑이에 홀렸는지 강의와는 담을 쌓고 살던 복학생 몇몇이 무슨 바람인지 너도나도 창비 영인본은 월부로 구입했다. 검정 분가루가 묻어나던 가볍지 않은 부피의 검정 양장본이었다. 어느날 술이 덜 깬 채 빈둥거리던 나의 손에 말그대로 하숙방을 장식하던 책술이 두꺼웠던 그중 한권이 손에 잡혔고, 시인의 시 몇 편이 눈에 들어왔다. 그후 20여년이 지났고, 단순소박한 삶을 꿈꾸며 서해의 조그만 외딴 섬에 자릴 잡았다. 차츰 시집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박재삼. 193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4살 때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와 자랐다. 한국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전통적 가락에 향토적 서정을 실었다고 평가받는 시인. 평생 가난과 병고와 설움에 시달리며 ‘가장 슬픈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노래했던 시인. 15권의 시집과 10권의 수필집을 남기고 시인은 1997년에 별세했다. 이 시집은 3부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59 시편이 실렸다. 작가 연보를 보고서야 나는 부마다 붙은 소제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인의 처녀, 2집, 3집의 표제였다. 그 중 1부에 한국의 향토적 서정과 한의 세계를 읊은 ‘춘향이 마음 抄’ 연작시가 7편이 실렸다. ‘꿈으로서 묻노니’에는 심청전이, ‘흥부 부부상’에는 흥부전이 모티브가 되었다. ‘옹기전에는’에 ‘밀양 박씨 어느 한파’라는 시구로 보아 시인의 본관을 알 수 있고, 무려 4편의 시편에 ‘남평 문씨 부인’이란 시구가 등장한다.
진주장터 생어물전에는/바다 밑이 깔리는 해 다 진 어스름을,
울엄매의 장사 끝에 남은 고기 몇 마리의/빛 발하는 눈깔들이 속절없이/은전만큼 손 안 닿는 恨이던가/울엄매야 울엄매,
별밭은 또 그리 멀리/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안 되어/손 시리게 떨던가 손 시리게 떨던가.
진주 남강 맑다 해도/신새벽이나 밤빛에 보는 것을,/울엄매의 마음은 어떠했을꼬,/달빛 받은 옹기전의 옹기들같이/말없이 글썽이고 반짝이던 것인가.
‘추억에서’(28쪽) 전문이다. 시인의 어머니가 광주리에 생선을 담아 행상을 하며 어렵게 살림을 꾸린 가난한 서정이 잘 그려졌다. 대보름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여름내 좋은 볕에 널어 말려 갈무리했던 나물들을 보따리에 이고 5일장에 나섰다. 다 못 팔고 남은 나물을 머리에 인 어머니가 동산에 떠오르는 멧방석만한 보름달을 보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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