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조선의 정궁 경복궁
지은이 : 신영훈
찍은이 : 김대벽
펴낸곳 : 조선일보사
‘마음으로 보는 우리문화’시리즈 1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나이를 먹었다. 2003년 초판 그대로다. 볼음도에 출장 갔다가 우연히 손에 넣은 책이다. 폐기하려고 묶은 신문 꾸러미에 이 책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분명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반강제적으로 구독한 신문의 연말 사은품으로 받은 책일 것이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던 세월 먹은 이 책은 폐지 무게를 불릴 요량으로 묶였는데, 어쩌다 내 눈에 뜨이게 된 것이다. 글쓴이와 찍은이가 눈에 익은 터였다. 책씻이를 하고 책장에 꽂힌 책들을 일별하니, 역시나 ‘97년도에 문학수첩에서 출간한 ’우리문화 이웃문화‘가 눈에 들어왔다. 동양 3국의 건축 문화를 비교한 책이었다. 지은이는 현재 한옥문화원 원장으로 승주 송광사 대웅보전,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을 중수하고, 진천 보탑사 삼층석탑을 신축한 대목이다. 우리 문화에 작은 관심이라도 가진 이에게는 눈에 뜨이는 이름 난 한옥의 명장이다.
광화문/흥례문/근정전/강령전/교태전/자경전/경회루/수정전/흥복전/집경당과 함화당/건청궁/재수각/풍기대/자선당. 이 책의 목차이면서 지은이의 발길이 경복궁을 돌아보는 순서다. 경복궁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초기에 창건된 전각 5,792간반, 궁성의 길이가 1,762 간으로 임진왜란 때 소실된 조선의 정국이었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일제는 창덕궁 재건을 핑계로 경복궁의 전각을 헐어내고, 조선총독부를 지어 경복궁의 면모와 위엄을 훼손했다. 거기다 해방 후에도 박정희 정권은 시멘트로 광화문을 지었고, 이름도 ‘光化門’에서 ‘광화문’으로 천민화(?)했다. 더군다나 국적불명의 국립민속박물관을 들어앉혀 경복궁의 경관을 크게 흐트러뜨렸다. 다행히 ‘96년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고, 2010년 경복궁의 남측 정문인 광화문을 복원했다. 그런데 복원한 지 3개월 만에 현판에 균열이 생겼다. 나는 여기서 저자의 따끔한 일침에 귀를 기울인다. ’옛 분들은 옛 터에 집을 다시 짖는다는 의미로 중건(重建)하였다고 겸손했는데, 오늘날은 일본식 용어인 복원을 고집한다.‘ 하지만 나는 지은이의 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동원된 민초들이 ’부역을 하였어도, 당백전으로 물가가 치솟은 세월을 사느라 고생은 되어도 나라 근본을 이루는 일에 한몫을 한 이들은 경복궁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40개월이 걸린 경복궁 중건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는 대공사였다. 턱없이 모자르는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대원군은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을 거두고, 부동산세인 결두전을 신설하고, 당백전을 새로 주조했다. 미곡 가격이 6배로 폭등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흔히 ’돈이 없다‘는 말인 ’땡전 한 푼 없다‘는 말은 당백전에서 유래한 말이다. 원납전을 받칠 수 없었던 민초들은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게 강행된 노역으로 많은 조선의 민초들이 목숨을 잃었다. 토건족 그들만의 잔치인 ’4대강 사업‘에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밤낮없이 동원된 고역에 목숨을 잃은 건설노동자 24명의 원혼들이 ‘홍수를 이겨 낸 4대강 사업’이라고 구렁이가 제 몸뚱이 치는 역겨운 잔치판에 박수를 보내고 있을까. 내게는 같은 소리로 들릴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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