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대빈창의 일몰

대빈창 2011. 12. 27. 02:01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입니다. 저는 서둘러 대빈창으로 향했습니다. 1년 중 낮이 가장 짧은지라 해가 급하게 지는 것 같았습니다. 갯벌을 어둡게 물들이면서 한해의 가장 짧은 해가 수평선 너머로 지고 있었습니다. 아! 수평선이 아닙니다. 지평선입니다. 이미지는 수평선으로 보이지만 실은 광활한 갯벌입니다. 지평선에 자리 잡은 무인도 분지도로 알 수 있습니다. 갯벌 끝 왼편으로 해를 등지고 노을 아래 검은 실루엣으로 보이는 섬입니다. 강화문화원에서 펴낸 ‘江華史(강화사)’의 부록으로 나온 ‘江都地名考(강도지명고)’를 펼칩니다.

中國大陸과의 交易이 있었을 때 西海寄港地가 이곳인가 하는데 옛날에는 첨사진(僉使鎭)(武官萬戶格)를 두었고 이곳은 宋, 明나라 使臣들이 寄着하였던 곳이라 하여 名稱이 전하여 진다. 이 待貧倉은 李朝時代에는 待貧廳으로 松海面 松亭村에 있었다는 記錄과 더불어 各島嶼에는 使臣館이 있어 外國使臣을 迎接하였으니 參考할 수 있다.

지명 유래가 언제부터였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한반도는 고대부터 중국과 무역이 성행하였습니다. 다만 ‘대빈(待貧)’에서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李朝時代’에서 일본강점의 식민지 잔재를 읽는 제가 너무 민감한지 모르겠습니다. 지명유래를 설명한 ‘강도지명고’의 ‘江都’는 강화가 한때 이 땅의 수도였다는 자긍심이 서려 있습니다. 고려 말 몽고침략 시, 고려왕조는 개성을 버리고 39년간 강화도로 천도합니다. 궁궐터였던 고려궁지, 팔만대장경 판각지였다는 선원사터, 고려 말의 대문장가 이규보 묘 등이 한때의 영화를 말해줍니다. 하지만 몽골 기마병의 말발굽아래 신음하는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섬으로 도망쳐 온 고려왕조의 천도가 자랑스러울수만은 없습니다.

얘기가 딴 길로 빠진 김에 한마디 덧붙입니다. 언제인지 대빈창 솔밭에 비석 5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섬 어르신들은 중국 손님과 관계있는 비석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비석으로 인해 옆 섬인 아차도 처녀가 바람이 났다고 합니다. 이에 아차도 청년들이 밤에 섬을 건너와 대빈창 비석을 모두 넘어뜨렸다고 합니다. 이 땅 방방곡곡 비석거리마다 전해 내려오는 ‘믿거나말거나’입니다. 비석을 남근의 상징으로 보는 이런 전래민담은 너무 많아 예를 들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여성비하를 엿볼 수있는 한대목입니다.

먼 옛날부터 주문도 아낙네들은 갯벌에 나가 조개를 캐 등짐을 지고 들어와, 대빈창 솔밭 비석터에서 땀을 들였을 것입니다. 물이 썰면 사진에 보이는 분지도까지 걸어 나갑니다. 뭍에서 멀수록 값나가는 귀한 조개인 백합을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개의 등급은 희귀성과 노역의 강도로 정해집니다. 지천으로 눈에 뜨이는 동죽은 손도 안댑니다. 여름한때 외지인들이 잡는 동죽은 잔손질이 많이 가고, 필히 해감을 시켜야만 먹을 수 있습니다. 해감은 조개가 먹이섭취에서 빨아들인 뻘과 모래를 토해내는 과정을 말합니다. 국물이 시원한 가무락은 어느 정도 뻘에 나가야 눈에 뜨입니다. 가무락도 해감을 시킵니다. 뻘의 조개눈을 보고 호미로 잡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물 때면 꾸어서라도 조개눈을 만든다'고. 그만큼 바지락은 세물에 가장 잡기가 수월합니다. 뻘의 끝머리에 사는 백합은 ‘끄레’라는 도구를 이용해 잡습니다. 뻘에 끄레를 끌면 조개가 걸리면서 딱! 소리가 납니다. 백합은 그물에 담아 무거운 돌로 지질러 놓습니다. 바람이 통하고 그늘진 곳이면 일주일 이상 삽니다. 백합은 작은 게와 공생을 합니다. 조개속에는 꼭 한마리의 살아있는 손톱만한 게가 삽니다. 저는 그 게가 뻘이나 모레 등 이물질을 먹어치워, 백합은 해감이 필요없는 줄 알고 있습니다. 동지가 일주일 쯤 지나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해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졌다’고. 엄동설한에는 조개들도 모두 뻘 속으로 깊이 파고듭니다. 날이 갈수록 해가 조금씩 길어집니다. 뻘 속 깊이 숨은 조개들도 그 낌새를 알아차렸겠지요. 낮이 길어지면서 조개들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기 시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