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엮은이 : 김익록
펴낸곳 : 시골생활
80년대 마지막 여름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 개강 어름이었을 것이다. 몇 학점 남지 않은 강의이었지만, 후배와 나는 학교에 가질 않고 하숙집에서 빈둥거렸다. 현장을 준비하던 후배와 나는 학점에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졸업장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졸업앨범 대금 고지서를 찢어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그까짓 대학졸업장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때 후배와 나는 현장 활동을 펼칠 지역적 거점 마련에 고심 중이었다. 그때 낮술에 불콰해진 얼굴로 한 후배가 방문했다. 그 후배는 그해 봄 학기 3학년으로 복학한 예비역이었다. 저항시인 김남주와 동향인 해남 출신이었다. 하지만 후배는 룸펜적 기질이 강했다. 항상 술에 쩔어 지냈다. 선후배간의 확실한 빈대로 악명이 높았다. 그도 우리의 현재 고민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후배가 한 권의 책을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동아전과 크기의 책 판형에 부피도 상당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녹색 장정에 지은이는 김지하로 ‘타는 목마름에서 생명의 바다로’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시인 김지하가 원주 무위당 장일순 선생으로부터 생명사상의 가르침을 받은 시기였다. 공장노동자의 삶을 준비하던 내게 그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리고 후배와 나는 각자 공단으로 흩어졌다. 20여 년 전 그 일이 이 책의 마지막 책장을 덮자 또렷이 떠올랐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좁쌀 한 알’,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 그동안 무위당에 관련된 책은 4권이 전부였다. 선생은 독재정권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아 될 수 있는 한 글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러기에 위의 책들은 선생의 강연 녹취록과 대담 자료, 흔치 않은 원고를 모아 편찬한 책들이었다. 이 책은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의 편집위원 김익록이 무위당의 서화와 위 책에 실린 글에서 가려 뽑은 말씀을 실은 잠언집이다. 책의 구성은 선생의 짧은 글 84개와 대한성공회 김경일 신부가 선생의 말씀을 메모노트한 글이 후반부를 장식했다. 그리고 선생의 서화 난초와 대나무 그림이 실렸는데, 겉표지 이미지인 사람의 얼굴을 담아 낸 ‘얼굴 난초(擬人蘭)’가 유명하다. 선생은 1928년에 태어나셔서 1994년에 돌아가셨다. 사람이 세상을 뜨면 주위 사람들이 흩어지게 마련인데,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사람들이 더 몰려들었다. 왜 그럴까. 선생의 생애를 잠깐 살펴보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인 원주로 돌아왔다. 20대 중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뜻을 계승하여 대성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봉직했다. 30세 되던 되던 해 최초로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전개했다. 70년대 지학순 주교와 함께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촉발시키다. 70년대 후반 공생의 논리에 입각한 생명운동을 재창했다. 83년 노동직거래조직인 ‘한살림’을 태동시켰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 붙인/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그게 진짜야./그 절박함에 비하면/내 글씨는 장난이지./못 미쳐. - 잘 쓴 글씨(30쪽) -
내가 서해의 작은 섬 주문도에 들어 온 지 7년이 되었다. 나를 여기까지 이끈 데는 녹색평론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10년 전 나는 무위당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잡았다. 언제인가 어머님은 액자 속 사진을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계셨다. 나의 대학졸업 사진이었다. 가난했던 우리 집.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사각모를 쓴 내가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졸업 앨범도 없이 공장을 다니던 내가 어머니의 속울음을 들었던가. 졸업식 날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식은 파하고 캠퍼스는 황사로 온통 뿌옇다. 삭풍은 왜 그리 모질게 모자의 헐벗은 마음을 할퀴었는 지. 카메라를 가방에 쓸어 담던 사진사 아저씨를 불러 급하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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