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대빈창 2013. 1. 24. 06:25

 

 

책이름 :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지은이 : 안도현

펴낸곳 : 한겨레출판

 

“명주실보다도 가는 햇살이” 이 책을 잡게 된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만나게 되는 시구다. 어느 시인의 시 구절인지 기억 못하지만, 어느 책에서 빌려 온 것인지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40여년이 다 되었다. 국민학교 5학년. 새 담임은 국어과목 류혜정 선생이었다. 지금 새삼 떠올리니 선생은 미인이었다. 하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뚜렷하였다. 국어 시간에 선생은 시커먼 시골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시 쓰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때 내가 제출한 시의 ‘한 구절’ 이었다. 이 구절은 세 살 터울 작은 형의 ‘완전학습’을 들추다 만났다. 나는 그때 국어시간만 되면 우쭐하였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작은 형이 읽어 내려가는 국어책을 귀동냥하면서 혼자 힘으로 한글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5학년이 되면서 중학에 들어간 작은 형의 책들을 넘보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시의 한 구절이었다. 선생이 물었다. ‘이 시 네가 쓴 시지’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은 알면서도 짐짓 어린 나를 떠보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예반에 들어갔다.

시인은 ‘시를 쓰려는 이’에게 세 가지를 주문한다. 술을 많이 마시고, 연애를 많이 하고,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으라고. 80년대 초반 문학평론가인 담임교수는 문청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술을 먹지 못하는 학생은 이 자리에서 자퇴하라. 국문학도로서 자격이 없다.’  얼씨구나! 나는 환호했다. 가난으로 대학 진학이 막혔던 나는 고된 농사일을 하면서 소주를 대접으로 먹었다. 세상에 대한 울분을 알코올에 기대 분노로 폭발시켰다. 허구헌 날 유치장에서 살던 나에게 질린 작은 형이 대학 등록금을 손에 쥐어 주었다. ‘벌금보다 등록금이 더 싸겠다.’ 하지만 시인과 문학평론가가 권한 술은 혼자 먹는 술이 아니었다.‘ 술은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이지 주정을 부리기 위한 약물은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학부시절 술을 마구잡이로 탐했다. 그리고 담임교수가 여름방학 리포트로 내 준 단편소설 창작이 나의 첫 습작이었다. 소설 부분에서 신춘문예 결선에 두어번 진출한 것이 나의 하잘 것 없는 문학 이력의 전부다. 작가 황석영은 ‘소설을 엉덩이로 쓴다’고 했다. 소설에 투자하는 시간의 집중과 인내력을 강조한 말이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는 엉덩이에 뿔이 난 스타일이라 진득하지 못하다. 내게 진즉 필요했던 것은 술과 연애와 다독이 아닌 무거운 엉덩이였던 것을 깨닫게 해 준 책읽기였다.

시인 안도현을 ‘84년 신춘문예당선작품집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 작품집은 소설문학사에서 펴냈다. 동아일보 당선작이 시인의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간절하게 참 철없이‘ 음식시편을 잡았다. 그리고 이 책은 ’좋은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 지, 좋은 시는 어떻게 쓰는 지‘ 30년 시업을 쌓아 온 시인의 詩作法이다. 이 책을 왜 손에 넣었을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시의 탄생을 이렇게 얘기했다. ’뜻밖의 우연한 순간에 시 한 편의 첫 단어가 추억의 한가운데서 불쑥 솟아나고 그로부터 시가 시작하는 것이다. 시는 경험이므로 사람은 일생을 두고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려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70년 혹은 80년을 두고 의미를 끌어 모아야 마침내 마지막에 겨우 열 줄 정도의 훌륭한 시를 쓸 수 있다.' 작은 시집 한권 가졌으면 좋을 나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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