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대빈창 2013. 1. 28. 03:15

 

 

책이름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지은이 : 천상병

펴낸곳 : 미래사

 

 

60 먹은 노인과 마주앉았다./걱정할 거 없네/그러면 어쩌지요?/될 대로 될 걸세 ······

 

보지도 못한 내 肝이/쾌씸하게도 구테타를 일으켰다./그 쪼무래기가 뭘 할까마는/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원래 구테타를 좋아하지 않는다./그 수습을/늙은 의사에게 묻는데,/대책이라고는 시간 따름인가!

 

'肝의 반란(99쪽)' 전문이다. 그렇다. 시인은 구테타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 시인이 구테타 세력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어쩔 수 없이 간첩이라고 시인한 사건이 바로 '동백림 사건'이다. 20여년 전 여름 나는 수덕사에 갔었다. 절문을 나서다 사하촌의 한 여관에 눈길이 끌렸다. 초가지붕을 한 수덕여관이다. 마당 한 구석에 넓적한 바위가 듬직하다. 바위 옆 평상에 앉아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막걸리와 파전을 먹었다. 그런데 바위에 그림이 그려졌다. 고암 이응로의 문자추상이었다. 화가를 찾으면서 1967년에 터진 ‘동베를린공작단사건’과 작곡가 윤이상, 시인 천상병을 알게 되었다. 사건이 터진 뒤 40여년 만에 진실이 밝혀졌다. 박정희 정권은 6·8부정총선 규탄시위를 무마할 정치적 목적으로 간첩단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시인의 대학 친구가 동베를린에 갔다 온 것이 빌미가 되어 모진 전기고문 끝에 시인이 간첩임을 허위자백한 것이었다.

시집은 4부로 나뉘어 104개의 시편이 실렸다. 시편들에는 먼저 세상을 뜬 시인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신동엽, 김관식, 김수영, 조지훈, 최계락 등. 시집에는 특정한 대상이나 사물이 되풀이되어 불려진 시들이 곧잘 눈에 뜨였다. 먼 山, 비, 길, 새, 主日 등. 自序에서 시인이 스스로 말했듯이 시편들은 60대에 씌어졌다. 나는 시편들에서 무욕(無慾)과 순진무구(純眞無垢)함을 읽으며 추사의 말년 명필 봉은사의 ‘판전’ 글씨를 떠올렸다. 나이를 먹으면 다시 아이로 돌아간다는 말은 맞다. 판전의 글씨는 아이가 쓴 글씨처럼 욕심이 없다. 시인이 60대에 쓴 시들은 아이의 마음처럼 때가 안탔다. 시인은 1993년 하늘로 돌아갔고, 시인의 영원한 팬이었던 부인 목순옥 여사도 인사동 전통찻집 ‘귀천’과 함께 2010년 시인 곁으로 돌아갔다. 시인이 살았던 노원구 상계동에 ‘시인 천상병 공원’이 문을 열었고, 의정부시는 시인의 시 '귀천‘의 한 소절에서 따온 ’소풍길‘을 조성했다. 그럼 이 시집의 표제 소절이 실린 ’歸天‘을 읊어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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