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 495m인 덕숭산은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정혜사를 거쳐 오르는 산길은 경사가 가팔랐다. 더군다나 한여름 햇살이 살갗을 후벼파듯 내리 쏟아붓자 온몸은 땀으로 목욕을 했고, 잔등에 짊어진 배낭은 축 처졌다. 입으로 연신 더운 열기를 내뿜으며 어느덧 산정에 오르니 홍성일대가 일망무제로 펼쳐졌다. 북으로 가야산(해발 678m), 남으로 일월산(해발 394m), 동으로 용봉산(해발 369m), 서로 삼준산(해발 490m)이 덕숭산을 둘러쌓았다. 수덕사를 벗어나면서 그는 수덕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낮으막한 경사길을 내려오면 기념품가게와 음식점들이 양안에 즐비한데,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 초가지붕이 보였다.
실개천을 건너면 안마당이 훤히 보이는 수덕여관이었다. 그의 발길을 유혹한 것은 다름아닌 고암 이응로의 문자추상이 각인된 암각화였다. 서너명이 올라가 술상을 벌이기 알맞은 두 채의 바위 둘레에 한글자모가 서로 엉켜 조화를 이루었다. 문자추상은 동양화가인 이응로가 프랑스로 건너가 추상미술을 접하면서 동양사상을 서양형식으로 그려낸 동도서기였다. 그는 암각화가 정면으로 보이는 평상에 자리를 잡고 녹두전을 안주삼아 홀로 국화주를 기울였다. 비명횡사한 권력자의 어두운 그늘을 5년 전에 그는 이곳에서 만났다. 일명 '동백림사건.' 1968년에 터진 이 사건의 내막은 유럽에서 예술활동을 펼치던 윤이상, 이응로등의 예술인들이 북한에 갔다 온 것을 빌미로 공작원으로 조작한 간첩단사건이었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은 죽음을 먼 타국에서 맞았고, 이응로는 옥살이를 한뒤 풀려나 여기에서 요양하다 바위그림을 남기고 다시 파리로 떠났다.
그는 수덕사와 고암의 발자취가 남겨진 수덕여관을 뒤로하고, 실학과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의 생가인 예산 신암면 용궁리의 추사고택으로 향했다. 추사고택을 찾아가는 길은 포근하고 정겹고 아늑했다. 낮으막한 둔덕이 연이어 밀려 들었고, 과수원의 사과들이 탐스럽고 푸짐하게 매달려 나그네의 마음마저 풍요로웠
다. 추사고택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었는데 안채는 □字형이고, 사랑채는 ㄱ字형이다. 추사가 태어난 명당인지라 위대성을 뒷받침하는 얘기가 전해왔다. 추사가 아직 태어나기 전 온 산천의 정기를 이어받으려는지 집우물과 팔봉산의 나무와 풀이 모두 말라버렸는데, 그가 태어나자 모든 것들이 생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기둥마다 추사체의 주련들이 붙어 있었고, 사랑채 앞에 ‘석년(石年)’이라 새긴 빗돌이 있는데 그림자 크기로 시간을 알수있는 일종의 해시계였다.
목마른 나그네는 추사고택을 벗어나 근래에 만들어진 돌거북 수돗가로 나왔다. 하늘은 아예 폭염을 내리 쏟아부었고, 물맛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때 예산행 버스가 도착해 그는 급히 올라탔다. 무지막지한 더위에 나그네는 지쳐 있었다. 답사 메모노트에 눈길을 주며 글을 이어가지만 아쉬울 수 밖에 없다. 추사고택에서 계곡하나 거리에 있는 추사묘와 반송, 천연기념물 제106호인 추사가 25세때 연경길에 종자를 얻어와 고조부 산소앞에 심었다는 백송(白松)을 놓친 것이다. 예산역으로 향하면서 그는 줄곧 추사고택의 수분한점 없이 깡말라 햇빛처럼 허옇게 바랜 사랑채 마루바닥을 떠올렸다. 그리고 석자 한지위에 마른 붓질로 4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 그리고 초가 한채를 그린 세한도(歲寒圖)의 휑한 여백을 머리속에 그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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