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조제를 건너 당진읍으로 향하는 길에 송악면 기지시가 나온다. 기지시는 이름에 ‘시’가 들어가 있으나 행정적으로 리(里)에 지나지 않는 마을이지만 중요 무형문화재 75호로 지정된 ‘틀무시’ 또는 ‘틀못’이라고 부르는 마을행사 줄다리기가 전해온다. 윤년 음력 3월에 먼저 당제를 지내고 치러지는 이 줄다리기 대동제는 400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줄다리기는 기지시를 관통하는 국도 아랫마을이 ‘물아래’로 한편이 되고, 윗마을이 ‘물위’라 하여 여러 자연마을이 참가한다. 원줄의 지름이 1m가 넘고, 그 길이는 50 ~ 60m에 이른다. 여기에 곁줄을 끼워 당기는데 남녀노소 할것없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공통이듯이 여기서도 암줄이 이겨야 풍년이 들어, 항상 ‘물아래’ 마을이 이길수밖에 없다.
나그네의 관심은 암줄과 수줄을 연결하는 비녀목에 있다. 기지시줄다리기는 비녀목을 물에 담갔다가 사용한다. 침향이 연상되었다. 향나무를 오랜 세월 갯펄에 담가두면 강철같이 단단해지고 쇳소리가 난다. 또한 향을 피워도 그을음이 안생겨 사찰에서 매우 귀중히 여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매향제의에 담겨진 변혁적 성격이다. 나라가 혼란스러울때 민중들은 향을 묻으면서 미륵하생을 기원했다. 미륵하생신앙, 즉 새 세상의 도래를 기원하는 매향의식은 비밀결사를 하듯이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려말선초 중앙권력의 힘이 덜 미치는 해안은 왜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민중들은 심리적 불안감에서 미륵불에 의탁하는 집단적 서원으로 매향의식을 치루었다. 그리고 의례의 전모를 비문으로 남긴것이 매향비다.
그는 매향비를 찾아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의 안국사터로 향했다. 행정구역상 당진이지만 오히려 서산쪽에 붙어있는 절터로 가는 길은 들녘이다. 승용차 한대가 다닐수 있는 폭좁은 길은 구불구불하지만 그런대로 콘크리트로 근래에 포장되었다. 볏대가 누렇게 제 색깔의 옷을 입기 시작했고, 벼이삭이 여물었다. 창건년대가 불확실한 안국사 절터에 나지막한 돌축대위에 석탑 1기와 석불입상 3분이 단촐하게 서있다. 그는 석불뒤의 ‘배바위’라 불리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바위로 다가갔다. 배바위 매향비(埋香碑)에는 경오년 2월에 포구 동편의 ‘천구’에 향을 묻고, 화주와 주민들이 세웠다는 내용이 얕게 새겨져있다. 갯펄에 향나무를 묻는 의식을 행하고, 그 내용을 비문에 새긴 것이다. 이땅 곳곳에서 미륵불로 모셔지는 남근석과 안국사터 배바위의 매향비. 그는 엉뚱하게도 배바위의 생김이 흡사 남근같다고 생각했다.
안국산 기슭에 자리잡은 절터는 적막했다. 막다른 외딴집으로 향하는 길가 오른편은 들녘이고, 왼편으로 산자락이 끝머리를 내렸다. 우람한 괴목과 기품있는 소나무가 절터를 에워쌓았고, 나이어린 배롱나무가 소담한 붉은꽃을 매달고 있었다. 돌축대가 계곡을 가로질러 보역할을 해 축대를 넘어 떨어지는 물소리가 적요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보물 제100호인 삼존불입상은 가운데 불상이 가장 커 거의 5m나 된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얹었는데 손가락 모양은 아미타불 구품수인중 중품하생을 취했다. 선돌을 연상시키는 긴 몸통에 네모진 얼굴에 판돌로 보관을 얹었다. 가운데 불상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월악산 하늘재에 있는 미륵리절터의 석불입상과 생김새가 비슷했다. 그옆 오른쪽 부처는 키가 3m에 이르는데 불편하게도 하반신이 묻혔다. 왼쪽 부처도 무릎 아래가 땅에 묻혔고, 더군다나 머리가 심하게 손상되어 보는이를 애처롭게 만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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