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내포(內浦)를 아시는가 - 3

대빈창 2013. 3. 25. 06:26

 

보물 제101호인 오층석탑은 삼존불입상 앞에 한단계 낮은 돌축대에 자리잡았다. 몸돌은 1층만 남았는데 사방불 개념으로 동․서․북면에 부처 한분씩을 돋을새김하였고, 남면에 자물쇠를 채운 문비를 새긴 특이한 구성이었다. 2층부터 몸돌이 소실되어 지붕돌만 겹쳐 놓았는데 그것도 1개가 부족하여 4개였다. 고려시대 양식을 보여주는 오층석탑 옆 연꽃대좌 위에 올라앉은 부처가 돋을새김된 몸돌이 하나있어, 예전에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소근거리는 맑은 계곡옆 돌축대에 걸터앉았다. 이름모를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정겹다. 담배를 꺼내 무는데 돌연 낯선 젊은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오층석탑앞 돌축대 아래에 지붕까지 모양새를 갖춘 평상이 길게 늘어섰는데, 젊은이는 연신 삼존불입상에 기도를 드렸다. 평상바닥 한켠에 잘익은 빨간고추가 가득 널려있고, 앞마당에 장독 수십개가 어깨를 마주댔다. 가람을 찾는 대부분의 불자들이 나이드신 노인네들로 인식된 그에게 몹시 낯선 정경이었다. 전각 하나없이 맨몸을 그것도 하반신을 땅속에 묻고 서있는 이름없는 절터 부처에게 지극정성으로 기원하는 젊은이는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그는 담배연기를 한움큼 내뱉았다. 청명한 대기속으로 푸른 연기가 서서히 퍼져나갔다. 한올한올 풀어지는 연기속에서 5년전 여름 그가 첫 답사로 충남땅을 밟으려 장항선 예산역 플랫폼에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첫 답사처는 덕숭산이 품고있는 백제고찰 수덕사였다. 건립년대는 백제 법왕원년(500년)으로 아비지가 건축하고 지명법사가 개창했다. 그뒤 원효대사가 중건하고, 근세에 경허와 만공 두 큰 스님을 낳은 명찰이었다. 누구나 수덕사하면 대웅전부터 연상한다. 그것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대의 고건물로 1308년이라는 분명한 건립년대를 갖고 있다. 대웅전은 역사성과 고색창연함으로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배흘림기둥이라는 특색을 지녔다.

그는 수덕사 대웅전 왼쪽으로 난 계곡을 따라 산정으로 향했다. 얼마쯤 오르자 일제강점기 우리 불교계를 지킨 만공스님(1872 ~ 1946)의 부도와 스님이 세운 25척의 미륵불이 나타났다. 스님은 1937년 조선총독 데라우치가 31본산 주지들을 불러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화하려하자 정면돌파로 우리불교를 지켜냈다. 스님은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만공스님은 숱한 일화로 유명했다. 어느날 스님이 산길을 오르는데 동행승이 다리가 아파 더이상 오르지 못하겠다고 하자, 마침 산밭을 일구던 부부를 발견하고, 스님은 대뜸 여자를 덥썩 끌어안았다. 놀란 남편이 스님을 쫒아오자 부리나케 출행랑을 쳤다. 산에 다 올라와 동행승이 그게 무슨 짓이냐고 스님을 꾸짖었다. 스님은 그제야 “그게 다 자네 때문일세. 그 바람에 힘들이지 않고 여기까지 왔지 않나” 하며 모든 것이 마음속에 달렸음을 일깨웠다. 시인 고은은 ‘절을 찾아서’에서 흔연히 법도를 넘어선 스님의 호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만공(滿空)스님은 한암(漢岩)스님과 더불어 근대고승의 쌍벽이었다. 한암스님이 곧고 높으면 만공스님은 걸리는 바 가 없이 넓었다. 높이나 넓이는 같다. 그러나 오대산 상원사는 경건하고 수덕사는 호방하다. 만공법맥을 이어받은 많은 후인들은 더러는 술도 마시고 여색도 두루 제도한다. 그것을 파계라고 하면 아주 어리석은 단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