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은밀한 여행

대빈창 2007. 11. 26. 12:52

 

 

책이름 : 은밀한 여행

지은이 : 이용한

펴낸곳 : 랜덤하우스코리아

 

위 책 이미지에서 왼편 귀퉁이에 세로로 쓴 작은 글씨의 문구는 '길 위의 시인 이용한의 소금처럼 빛나는 에세이'다. 그렇다. 시인은 10년 전에 등단하지만 '정신은 아프다'와 '안녕 후두둑 씨'  2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아마, 시집에 실린 시편들도 대부분 여행길에서 건져올린 편린들로 짐작된다. 시인은 고백한다. 막상 다니던 잡지사를 때려 치고 방랑과 방황의 길 위에 서니, 호구지책이 절실해졌다. 그러기에 시인이 그동안 펴낸 여행서는 쌀을 사고,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경비로 지출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본업인 시인보다는 분업인 여행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오늘도 시인은 중고 4륜구동 지프에 카메라와 비상식량인 초코파이와 바나나 우유를 싣고, 오지의 비포장 길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 10년간의 역마살이 빚어낸 '소금처럼  빛나는' 문장들이 엮여져, 회색 도시풍경에 포로가 된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시인의 문화기행서 중 가장 먼저 출간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를 잡았고, 10여년 만에 여행에세이 '은밀한 여행'을 잡고, 흰 공백의 모니터를 마주하고 있다.

'시대착오적 향수병자(?)'인 시인의 10년간의 풍찬노숙에서 걸러 낸 '은밀한 여행'은 '새 것의 깨끗함과 세련됨보다는 오래된 것의 손때 묻음과 닳음, 빛바램, 쓸모없음'에 대한 애책이 빚어 낸  길에 대한 에세이다. 시인의 발길이 닿은, 때묻지 않아 적막과 서정이 깃든 29곳의 길과 사람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스러져가는 것들에 대한 시인의 물기먹은 애잔한 마음은 마지막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서 당신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가만 보면, 당신은 조용히 울고 있다.'

'길 위의 시인'의 여행 에세이를 읽고나니, 배낭을 짊어진 젊은 시절의 내가 떠 올랐다. 뭉뚱그려 10년 주기로 나의 여행지를 그려보면, 20대는 산을 즐겨 찾았다. 사람을 받아들을 줄 아는 우리나라의 산들을 시간만 나면 풀방구리 드나들 듯 했다. 30대는 이념의 허기진 공백을 문화유산에 대한 애정으로 메꾸었다. 산중사찰의 적막과 고요가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 주었다. 이제 40대가 되어서야, 나는 등고선을 기어오르는 노고를 뿌리치고 인공이 자연 속으로 부드럽게 습윤된 별서정원이나 원림을 찾는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도가 낮아진 것이다. 이념을 향한 가파른 지향에서 현실의 낮은 곳을 고개숙여 오랫동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그 꿈을 버리고 싶지 않다. 10여년 전에 읽었던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에서 눈도장을 찍어 둔 곳이 있었다. 행정구역명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으나, 삼척의 궁벽진 두메산골이었다. 산중 계곡의 외떨어진 오두막 흙집에서 나의 마지막 삶을 의탁하는 것이다. 돌담으로 둘리어진 안마당을 가르며 깊은 산의 계류가 흘러들고, 안채를 향하려면  그 계곡물에 드리워진 징검다리를 건너는, 아마! 시간의 흐름도 느리게 흘러갈 것만 같은 그 집. 해 짧은 산중 텃밭의 푸성귀를 가꾸다가, 그것도 지루하면 계류에 몰려든 버들치에게 먹다만 밥알이나마 던져주는 안빈낙도의 배부른(?) 상상에 혼자 빙긋이 미소를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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