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산티아고 거룩한 바보들의 길
지은이 : 리 호이나키
옮긴이 : 김병순
펴낸곳 : 달팽이
목에서 산화작용이 일어났다. 며칠 동안 목구멍 안쪽 깊은 곳에서 단내를 넘어 선 황내 섞인 쇳내가 피어올랐다. 기운이 하나도 없다. 온 몸이 짜부러졌다. 저절로 무릎이 꺽였다. 서 있을 수가 없다. 머리 가죽과 두개골이 분리되어 흔들리는 느낌이다. 머리가 무겁다. 서둘러 두통약을 삼켰다. 방바닥에 등을 대고 몸을 눕혔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콧물, 발작적으로 터지는 기침, 목구멍을 꽉 메어 숨쉬기조차 곤란한 가래. 지독한 몸살감기였다. 다행히 주말이었다. 나의 책읽기는 일상만큼 단조롭다. 해가 떨어지면 책을 잡고, 쉬는 날 낮에 두 편의 리뷰를 작성한다. 한 두 시간이면 족하다. 하지만 이번 주말은 몸 상태가 글렀다.
책장에서 책술이 두꺼운 책을 빼들었다. 무려 550여 쪽이나 되었다. 낯익다. 리 호이나키. 5년 전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잡았다. 농부철학자 윤구병이 떠올랐다. 리 호이나키는 정년이 보장된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경제·화폐 중심의 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골로 들어가 농부의 삶을 살았다. 이 책의 부제가 ’리 호이나키의 카미노 순례기‘이다. 여기서 카미노는 말 그대로 길 또는 도로를 뜻한다. 스페인을 관통하여 산티아고에 이르는 길을 ’카미노‘라 한다. 잘 알다시피 산티아고 가는 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례길로 알려졌다. 산티아고 열풍은 이 땅에도 불어 얼마전 순례길 안내서가 우후죽순 출간되었다.
1993년 5월 리 호이나키는 절친한 벗 이반 일리치의 권유로 예순다섯 살의 나이에 간단한 옷가지만 배낭에 챙겨 홀로 카미노 순례길에 올랐다. 그는 이반 일리치에게 선물 받은 20년 된 낡은 등산화를 신었다. 리 호이나키는 프랑스 남부 국경마을인 생장피드포르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를 횡단하여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까지 장장 800㎞에 이르는 순례길을 홀로 걸었다. 책은 32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순례 여정이 정확히 32일이 걸렸다는 뜻이다. 리 호이나키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고, 카미노 순례자들이 쉬거나 묵어갈 수 있도록 마련된 쉼터인 ‘알베르게’에서 하루 여정을 마치고 일기를 썼다. 순례길은 첫날부터 무릎 통증으로 고통스럽고, 쏟아 퍼붓는 비바람에 길을 잃고, 질척이는 진흙길의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하지만 리 호이나키는 오직 자신의 발로 고통스럽게, 겸손하게 걷는 고독한 순례자였다.
그렇다.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옛날처럼 아직도 진정한 구도의 길을 찾아 성지를 향해가는 순례자의 길이었다면 아무도 이런 책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이 관광객들을 위한 길로 바뀐 지금, 리 호이나키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 길을 그렇게 걷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을까.(6쪽)’ 현대인들은 TV에 완전히 포로가 되었다. TV는 사람들이 직접 할 수 있는 것에서 멀어지게 설계되었다. 주말 어머니를 찾아 섬에 들어 온 형제들은 웬 종일 낮잠에 취해 있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산티아고 순례길’ 특집을 비몽사몽 쳐다보다가 다시 잠에 빠져 들었다. 스페인과 EU는 카미노를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현대적인 프로젝트를 가동시켰다. 잘 포장된 길을 따라 자동차를 타고 유적지를 둘러보는 관광객을 끌어 들이는 인프라 구축이다. 경박스럽다. 이 땅의 유명 산중사찰 일주문까지 아스팔트로 포장하는 꼬라지와 같다. 참담하다. 상품경제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유럽이나 이 땅이나 매한가지다. 현대 문명은 사람들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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