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백성백작
지은이 : 후루노 다카오
옮긴이 : 홍순명
펴낸곳 : 그물코
표제를 얼핏 보면 중세 유럽의 계급문제를 다룬 책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를 잇는 작은 點’을 자임하는 그물코가 펴낸 책이지 않은가. 백성百姓과 백작百作이다. 즉 ‘농부는 백가지 일을 하고 백가지 작물을 기른다’는 뜻이다. 벌꿀, 딸기, 달걀, 대나무, 햇오리, 천둥오리, 보리, 감자, 고구마, 토마토, 가지, 피망, 옥수수, 멜론, 수박, 호박, 강낭콩, 오쿠라, 오이, 파, 양배추, 상추, 생강······ 등. 백가지 일에서 주된 일은 ‘오리농법’이다.
지은이 후루노 다카오는 1978년부터 유기농법을 시작한 농부다. 그리고 1988년 천둥오리를 논에 넣어 제초 작업을 하는 오리농법의 창시자다. 옮긴이 홍순명은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대안학교인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의 산증인으로 46년을 학교와 함께 살아왔다. 현재는 대안대학인 풀무학교 환경농업전공부에서 이 땅의 가장 위대한 민중인 유기농 농부를 길러내는 교사다. 유기농업의 메카.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나는 서너 번 발걸음을 했다. 문당리 환경영농조합법인은 오리농법으로 친환경 농사를 짓는다. 이 땅에서 최고의 마을공동체, 지역공동체를 일구어 낸 ‘자립하는 마을, 생각하는 농민, 우리 마을’은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를 중심으로 29개 생산공동체가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인다. 생태주의와 생명운동에 관련된 책을 전문으로 출간하는 1인 출판사 그물코의 사장인 장은성은 2004년 서울에서 홍성으로 이사했다. 그의 다짐은 이렇다. ‘생태주의 관련 책을 낸다. 재생용지만을 쓴다. 양장은 만들지 않는다. 신념에 맞지 않는 책은 만들지 않는다. 광고를 하지 않는다. 2천부 이상 팔리면 베스트셀러라고 생각한다.’ 출판사는 사라지고 출판 공장만 난무하는 천민자본이 날뛰는 이 땅에서 나의 책장에 그물코의 책들이 쌓여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 책은 1부 38꼭지, 2부 28꼭지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읽기가 편하다. 글 끝에 5, 7, 5조의 3구 1음의 일본 서민용 짧은 시인 센류(川流)가 실렸다. 하루아침에 만들 수 없는 ‘흙과 토지’의 끝머리 센류다.
조용한 겨울 햇볕 받으며
은행잎은 땅에 떨어진다
‘우리 조상은 볏짚이나 보리짚으로 퇴비를 만들어 해마다 논밭에 넣는, 노동력이 엄청 드는 일을 꾸준히 계속 해왔다.(65쪽)’ 나는 이 꼭지를 읽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속울음과 눈물을 떠올렸다. 텃밭이 고작이었고, 논만 네 마지기인 아버지는 소농이었다. 아버지는 기계치셨다. 자전거를 타실 줄을 몰라 그 먼 논을 삽 한 자루 어깨에 메시고 두 발품만 파셨다. 우리 논 두 마지기는 벌판을 가로지른 건너 마을에 붙어 있었다. 걸음으로 한 시간 거리였다. 꽁꽁 언 겨울이면 아버지는 리어카에 퇴비를 싣고 그 먼 거리를 오가셨다. 그리고 해토가 되기를 기다려 논바닥에 퇴비를 골고루 뿌리셨다. 가난한 살림으로 경운기는 언감생심이었다. 어느해 겨울, 퇴비를 리어카에 싣던 아버지가 무슨 소문을 들으셨는지 그날로 몸져 누우셨다. 그 논은 우리 땅이 아니었다. 이모할머니 땅을 아버지가 부치신 것이다. 이종사촌은 아버지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땅을 처분했다. 땅 힘이 좋았던 논에 욕심을 내던 들녘건너 농부가 마을 앞 논과 바꾸자고 말을 건네기도 전에 아버지는 도리질을 치셨다. ‘어림없지, 소출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아버지의 땅에 대한 정성은 남 좋은 일만 시킨 꼴이 되었다. ‘땅이 팔린다는 것을 알았다면 빚을 내더라도 내가 샀는데.’ 나는 그때 아버지의 마른 얼굴에 흘러 내리던 눈물을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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