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인간의 시간

대빈창 2013. 5. 6. 06:26

 

책이름 : 인간의 시간

지은이 : 백무산

펴낸곳 : 창작과비평사

 

내 하루의 하늘이 손바닥만한 창살인데/쇠창살에 앉아 날개 쉬는 부리가 붉은 새여 새여/역광을 받은 네 날개짓이 눈부시구나/얼마를 싸워서 이긴 자유이기에/부리가 그토록 붉고 붉은가

 

‘부리가 붉은 새(20 ~ 21쪽)’의 마지막 연이다. 3부에 나눠 실린 65편의 시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끌었다. 표지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남궁산의 목판화가 새삼스럽다. 붉은 부리의 검은 새가 조롱 속의 횟대에 올라 노래하고 있다. 17년 만에 시집을 다시 들추었다. 흰 표지와 책술은 완연하게 누렇다. 1996년의 늦여름. 나는 인천 십정동의 작은 형이 몸담고 있는 도금공장을 나와 뙤약볕이 지글거리는 아스팔트를 걸어 동암역에 닿았다. 작은 형은 여적 그 공장에서 일한다. 그때만해도 소규모였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은 당연히 한국인이었다. 지금 노동자들은 전부 이주자들이다. 조선족과 동남아인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작은 형은 5명 안팎의 노동자들의 현장 일을 책임지는 공장장이다. 독한 크롬 도금으로 콧구멍 막이 삭아 소처럼 코뚜레를 꿸 수 있다는 열악한 작업환경. 작은 형은 30년을 버티고 있었다. 무슨 일로 작은 형을 만났는지 기억이 없다. 김포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인천 변두리 전철역 광장의 맨 땅에 늦여름 정오의 햇살이 마구 퍼붓고 있었다.

2층 역사로 오르는 계단 옆 작은 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프롤레타리아. 무산無産으로 이름을 고친 노동자 시인. 첫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가 1988년에 나왔다. 출판사는 靑史다. 노란 바탕에 징을 두드리는 민중을 그린 목판화가 표지를 장식했다. 문학과지성사는 ‘이산(怡山) 김광섭’을 기리는 이산 문학상 제1회 수상작으로 노동자 시인의 첫 시집을 선정했다. 수상 연설의 에피소드가 임우기의 해설 ‘혁명의 그늘 속에서 자라는 생명 나무’의 서두를 장식했다. 대공장이 밀집한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 시인과 동료들은 쇳소리로 노동해방 구호를 선창하고, 노동해방 가요를 우렁차게 합창했다. 그리고 노동해방의 당위성에 대해 짧은 연설을 마치고, 단색 작업복 차림의 강철 같은 동료들과 식장을 빠져 나갔다. 창백하고 파리한 지식인들의 식겁한 표정이 떠오른다. 나는 시집에서 이 구절만 뇌리 한 구석에 남아있다. ‘화염병을 아가리에 쑤셔버리고 싶다.’ 나는 월세 지하방에 터를 잡고 안산공단의 화공약품 공장에서 첫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을 공단도시의 사회과학 서점에서 손에 넣었다. 노동문학사에서 출간한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다. 표지 그림은 멀리 여명이 터오고 일군의 노동자들이 투쟁을 준비하며 머리띠를 묶고 있다. 80년대말 현대중공업의 4개월간에 걸친 파업투쟁을 형상화한 대서사시였다.

 

대지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거역한다/소모와 죽음의 행로를 걸어온,/날로 썩어가고 황무지만 진전시켜온/죽은 시간을 전복시킨다/대지는 단절을 꿈꾼다/모든 것이 모든 것에 순응하는 지휘계통/대지는 이렇게 혁명을 하는 것

 

표제시 ‘인간의 시간(45쪽)’의 5연이다. 시인은 1997년부터 경남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라는 시골마을에 살고 있다. 농사지으며 시 쓰는 귀농시인이다. 시인은 농촌의 자생력을 살리는 게 ‘시의 힘’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노동에서 한 걸음 이동했습니다. 투쟁 일변도의 시에서 인간의 내면을 탐색하는 쪽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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