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코끼리는 사뿐히 걷는다 - 2

대빈창 2013. 8. 26. 06:49

 

비행기는 제주도 상공에서 중국대륙의 상해로 기체를 돌렸다. 창밖 하늘은 곧은자로 일직선을 그어 3등분한 후에 초등학생들이 원색 크레파스로 색칠한 것과 같았다. 맨위 새파란 하늘, 중간 흰구름, 아래는 짙은 청색이었다. 태양은 여전히 오른 날개위에 붙어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해가 지는 방향으로 나아가, 끝날 줄 모르는 일몰이 펼쳐졌다. 그때 기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나의 비행기 승선감은 잔잔한 물살을 가르는 경쾌한 요트로 인식되어 있는데, 웬걸 비포장도로를 우당탕! 달리는 지프의 승차감에 못지 않았다. 귀가 멍멍한 증상은 가셨지만, 흔들리는 기체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류가 불안정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기내를 도는 스튜디어스에게 일행은 붉은 와인이나 주스를 주문했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기내를 돌며, 바닥에 흘린 쓰레기를 줍거나, 좌석의 안전벨트를 확인하는 등 승객들의 불편을 일일이 점검했다. 기내 승객들에게 작은 비닐봉지에 든 먹거리가 배급되었다. 봉지의 문구는 온통 영자 투성이었다. 내용물은 기름에 튀긴 땅콩 열 몇개가 들었다. 늘씬한 팔등신 미녀들로서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이 선호하는 직종인 스튜디어스가 하는 일이 내게 싱겁게 보였다. 비행기 탑승이 처음인 내가 과문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큰식당에서 잔반을 나르는 일과 카페에서 차를 나르는 서빙을 합쳐놓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21C 스튜디어스는 고된 서비스업종이었다.

비행기는 황해를 건너 중국대륙으로 들어섰다. 저멀리 푸른 하늘에 열병하는 군대처럼 남북으로 늘어선 뭉게구름 사이로 상해시가 보였다. 승천하는 용인 중국을 상징하는 상해시. 시가지는 정형화된 직사각형으로 구획되었다. 건물들 지붕이 대체로 큰 것으로 보아 공장지대 같았다. 비행기는 상해시를 통과하면서 방향을 남서로 돌렸다. 방콕을 향해 일직선으로 인도차이나 반도를 관통했다. 우리 시각으로 저녁 7시 25분, 기내의 실내등이 모두 꺼지고, 대형 모니터에 '터미네이터3'가 상영되었다. 자막이 중국어라, 승객들은 제각기 미리 지급된 이어폰을 찾았다. 승객들은 어슴푸레한 기내에서 좌석을 뒤로제껴 눈을 부치거나, 스크린에 눈길을 모았다.

눈을 감았으나, 쉽게 잠이 오질 않았다. 기체의 작은 창을 덮은 플라스틱 커텐을 위로 제쳤다. 아! 열대 하늘은 눈을 지상으로 뿌리지않고, 하늘에 감추었다.  한겨울밤 아무도 몰래 퍼부은 함박눈으로 온 천지가 하얗게 변한, 이른 새벽 바람에 쓸려 여기저기 작은 둔덕을 이룬 끝없는 눈평원이었다. 흰구름이 시베리아의 광활한 툰드라처럼 시야 끝간데없이 펼쳐졌다. 그 광활한 눈평원 지평선으로 주황색 라인이 일직선을 그렸다. 단 한곳의 틈새도 없는 눈평원, 아니 구름바다의 수평선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우리시각 밤 8시 30분이다. 창밖은 말 그대로 먹물을 뿌려 놓았다. 창은 실내를 비추는 거울로 변했다. 상냥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기내를 오가는 스튜디어스에게 주스를 건네 받았다.

태국 현지시각 저녁 7시. 동체가 점차 고도를 낮추었다. 귓속은 어렸을 적 개울가에서 헤험치다 물먹은 것처럼, 또는 창밖 어둠처럼 멍먹해졌다. 햇볕에 따듯하게 달구어진 조약돌을 귀에 대이면 나아질까? 창밖 칠흑같은 어둠속에 한여름밤의 반딧불이처럼 사람살이의 흔적인 불빛이 점점이 나타났다. 방콕공항 상공. 수족관의 고기들이 등이 켜지며 놀라 일제히 몸을 뒤채이는 것처럼, 승객들이 좌석을 끌어 당겼다. 기내방송은 안전벨트 착용과 모든 전자기기의 사용 자제를 알려왔다. 방콕 변두리는 어둠속에 침잠되었다. 가로등만 일렬횡대로 늘어섰다. 중심가로 접어들면서 차량들이 도로에 보이기 시작했다. 모든 도시의 밤풍경은 어디나 매한가지였다. 거대한 짐승이 중심부의 눈을 뜬 채 어둠속에 잠겨 있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