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코끼리는 사뿐히 걷는다 - 4

대빈창 2013. 8. 30. 07:43

내 몸의 위치 좌표는 공간적으로 태국인데, 몸안에 내장된 시계는 여전히 한국의 똑딱! 거리는 시간을 나타내고 있었다. 술자리를 파하고 침대에 몸을 눕힌 시간은 새벽 1시였다. 눈을 뜬 시각은 정확히 5시였다. 그렇다. 내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눈을 뜨는 7시였다. 내 몸의 시계는 정확한 시각에 나의 의식을 열었다. 알코올에 찌든 몸의 갈증으로 냉장고의 생수를 들이키고, 다시 침대에 누워 가수면을 취했다. 아니나다를까 옆 침대의 동료 몸 시계도 나와 같은 한국시계였다. 그가 일어나 입구문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동료의 잠을 방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머리맡 삿갓등 불을 밝히고 메모를 긁적였다.

객실 바람벽은 온통 거대한 통유리로 전망이 환했다. 내가 묶고 있는 객실은 19층. 방콕 시내는 새벽의 어스름에 잠겨 있었다. 도로가를 따라 니켈 가로등만이 제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눈앞의 고층빌딩들은 거대한 공룡처럼 어둠속에 제 몸을 사렸다. 도로를 달리는 몇몇대의 차량이 한가로웠다. 방콕시내 중심가에 자리잡은 호텔이지만, 휘황찬란한 네온싸인의 천박스런 들뜸이 없어 적막했다. 고작해야 고층빌딩의 상호가 건물 이마에서 붉은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7시30분. 일행은 호텔 라운지에 모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 오는데, '2'라는 숫자대신 영자 'L'이 눈길을 끌었다. '라운지'를 의미할 것이다.

호텔로비에 종업원 태국 아가씨들이 미니스커트 차림에 날씬한 종아리를 뽑냈다. 그리고 어투가 빨라 소음처럼 들리는 태국어가 난무했다. 의외로 태국인의 피부색은 다양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서 백색 대리석의 하얀 피부까지 천차만별이었다. 거기에 몸매는 한결같이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처럼 갸날펐다. 어제 술

자리를 함께한 2명의 가이드, 그리고 '팜'까지 일행 10명은 호텔 뷔페로 들어섰다. 낮선 이국음식이라 모두들 입맛을 달래가며 조심스레 음식을 입으로 가져갔다. 만만하게 보이는 것이 빵과 커피, 계란 후라이였다. 그리고 후식으로 모두 수박을 집어들었다. 그때 누구인가 집어든 과일조각에서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흡사 호두열매나 은행이 터진 것 같았다. 모두 코를 감싸쥐었다. 가이드가 '파파야'를 설명했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후식으로 수박이나 배, 사과를 먹듯 태국인들이 소화제 격으로 즐겨찾는 과일이었다. 덧붙여 태국에서 '과일의 왕, 또는 악마의 과일'이라 부르는 두리얀까지. 워낙 고가라 태국에서도 부자들만 맛볼 수 있는 과일인데, 외국인들은 근처에도 얼씬 못할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고 했다. 음식문화의 국가적 다양성.

태국은 주 5일 근무제로 퇴근시간 이후 건물 전체를 소등시켜, 밤이 되면 거리가 어두웠다. 또한 고층빌딩을 에워싼 어두운 공간은 늪지거나, 가난한 이들의 판자촌이었다. 새벽녘에 보았던 풍경에 대한 의문을 덜어내고 담배를 피우려 호텔 정문을 밀쳤다. 후각을 자극하는 미묘한 냄새가 대기를 장악하고 있었다. 불교국가인 만큼 사원에서 피워 올리는 향내일 것이다. 가이드가 덧붙였다. 태국 음식에 필수로 첨가하는 향료도 한 몫한다고. 습기많은 무더운 기후로 음식이 쉽게 변질되어 부패를 막는 향신료가 발달할 수 밖에 없는 태국 음식문화였다. 호텔에 묵은 외국인 관광객으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눈에 뜨었고, 뒤를 이어 중국인, 인도인, 일본인, 동남아인 순이었다. 호텔 현관앞 마당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차량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