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원사는 백제가 남조인 양나라와 교역이 무르익던 6C 중엽에 창건된 고찰로 추정되었다. 그후 백제 멸망까지 거대사찰로 융성하였고,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 보원사에 대한 기사가 실려있어 통일신라 화엄십찰의 하나로 보았다. 보원사는 고려조 법인국사가 머물면서 고려시기 왕권의 보호를 받는 화엄종의 대찰로 절터가 무려 3만평이나 되었다. 절이 망한 시기는 문헌상 기록이 없어 정확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중기 이전에 이미 폐사가 되었을 것이다. 잡풀과 잡목이 우거진 폐사지에서 나그네를 제일 먼저 맞은 것은 보물 제103호인 당간지주였다. 4.2m의 잘빠진 몸매를 자랑하지만 단순한 테두리만 둘러 조각은 화려하지 않은 통일신라시대 유물이었다. 보물 제104호인 오층석탑은 높이가 9m나 되는데 상륜부를 이루던 철제찰주가 남아있어 거의 원형에 가깝다. 특이하게 하층기단의 면석 열두칸에 모두 한마리씩의 사자를 새겨넣었다. 또한 상층기단 한면에 둘씩 팔부신중을 새겨 통일신라 양식을 보여주는 고려초기의 석탑이다. 절터 오른편 잡풀 사이에 철책 난간이 둘러졌는데 길이 3.5m에 높이 90cm인 보물 제102호인 석조가 누워있다. 통돌을 공력을 다해 정으로 쪼아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현대인들의 무한경쟁 속도전이 빛어낸 날림공사가 연상되어 입안에 쓴 침이 고였다.
절터를 가로지르는 계류에 어린아이 머리만한 돌들로 보를 쌓았다. 나그네는 절터 맨 뒤에 자리잡은 말끔하게 정리된 공간으로 힘들이지 않고 건넜다. 그곳에 보물 제105호인 법인국사 부도와 그의 행적이 소상히 기록된 보물 제106호인 법인국사 부도비가 돌축대안에 자리잡았다. 비문에 따르면 부도와 부도비는 고려경종 3년(978)에 건립된 연대가 분명하여 부도 연구의 기준작이 되는 귀중한 유물이었다.
메모노트에 긁적이던 잉크가 빗물에 번지기 시작했다. 왠종일 심통사납게 꾸물거리던 하늘이 드디어 한바탕 장대비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빈공터에 세워둔 차로 돌아왔다. 내리 퍼붓는 빗줄기가 얼마나 거센지 차유리에 미처 물방울로 맺히지 못하고 고랑을 이루며 흘러내렸다. 그는 막연한 심정으로 황량한 폐사지에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언젠가 책자에서 보았던 처량한 성주사지의 민불을 떠올렸다. 그 불상은 깨진 얼굴을 덕지덕지 시멘트로 보수하였는데 처절하게 고통받는 민중의 표정을 짖고 있다. '매 맞을대로 맞은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아산방면으로 길을 틀었다. 이번 답사여정을 여기서 마무리 짖기로 했다. 아산방조제를 지나 경기땅 평택에 들어서니 웬걸! 딴 세상이라도 되는듯 한여름의 폭양이 아스팔트를 지글지글 끊였다.
짧은 여정과 후회에서 오는 긴 아쉬움이 자꾸 뇌리속에 남았다. 그렇다. 승용차를 이용한 속도전식의 답사는 정서적 여유를 챙길 수 없는 조급함만 초래했다. 자연과 동화되는 선조들의 유유자적한 답사를, ‘채근담’의 권고를 가슴깊이 새길 일이다. - 林間松韻 石上泉聲 靜裡聽來 識天地自然鳴佩(임간송운 석상천성 정리청래 식천지자연명패) : 숲속의 솔가지를 스치는 바람과 돌틈을 달리는 물소리도 마음을 고요히 히고 들으면 천지자연의 음악이다.-
시작하면서 인용했던 ‘옛길’ 中에서 여행에 대한 기억과 글쓰기의 상기력에 대한 필연성을 마무리로 삼았다. - 글을 쓰는 행위는 이미 했던 여행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생각을 적절한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솔직함, 진실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남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이 달려있다. 여행을 마치고 글을 쓰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밀듯 다가오는, 나를 앞질러 가는, 내앞에 현전하는 하나의 사유인 셈이다.- 안치운, 「옛길」, 학고재, 1999년, 14쪽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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