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내포(內浦)를 아시는가 - 8

대빈창 2013. 5. 31. 04:19

 

다리를 건너면 일제시대 서화가로 일세를 풍미했던 해강 김규진의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보물 제143호인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조선초기 건물로서 고려양식의 맞배지붕 형식이었다. 해탈문을 지나면 천연스럽게 굽은 나무로 기둥과 문지방을 삼은 심검당이 보였다. 단청이 없어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깊은맛을 느낄수 있는 건물이었다. 심검당은 송광사의 하사당, 환성사의 심검당과 함께 초기 요사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건물로 대접받고 있다. 나는 연못가에서 연신 담배를 물고있는 기사 아저씨의 무언의 항변을 더이상 모른체 할수없어 머뭇거리는 발길을 돌렸다.

우리나라의 성(城)은 나라중심 수도의 도성(都城)과 군,현에 위치한 읍성(邑城)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군사요충지에 성곽을 둘렀다. 외침방어용인 산성이 산정이나 계곡에 설치된 반면 읍성은 행정중심지의 평지에 설치되었다. 그 대표격이 낙안읍성과 지금 찾아가는 해미읍성이었다. 해미(海美)는 작은 시골 면소재지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의 두 현을 조선 태종7년(1406)에 병합하면서 얻은 이름이었다. 해미읍성은 둘레가 1.8㎞, 넓이는 2만평으로 성벽의 높이는 5m 가량으로 예전에는 성문이 드러나지 않도록 바깥에 둥글게 둘러친 옹벽 2개와 우물이 6개나 있었다. 성둘레에 외적방어용 탱자나무 울타리가 둘러처져 지성(枳城)이라고 불렸

다. 읍성의 남문 진남루는 보전이 잘되어 홍예 위에 3칸 2층 누각을 올렸다. 성벽을 뒤덮고 있는 담쟁이 덩굴이 중천에 떠오른 햇살을 이리저리 흩뿌렸다. 성내에서 나그네의 눈길을 끄는 것은 수령 600년이 넘은 호야나무였다. 초창기 천주교 열기가 이 땅 어느곳보다 높던 내포지방은 1866년 병인양요 이후 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이 큰 감옥이 자리잡은 해미읍성에 끌려와 투옥과 고문, 교수형 당했다. 지금도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호야나무 윗둥치에 철사줄이 그대로 박혀있어 그 시절의 처참한 역사를 환기시켰다. 충청 내포 땅은 해로로 중국의 선진문물이 가장 먼저 전파되었던 지역으로 18C 말에 천주교인이 대폭 늘어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은 여기서 멀지않은 당진 우강 출신이고, 합덕은 전국에서 가장 많은 신부 40명과 수녀 50명이 나온 지역으로 천주교인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그는 안국사터의 배바위 매향비를 찾아가면서 자료를 뒤적이다 해미읍에도 매향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해미매향비는 충청병마절도사가 해미읍성으로 옮겨온 지 13년만인 세종9년(1427)에 세워졌다. 가로 90cm, 세로 50cm인 이 자그마한 비에는 민중들의 려말선초의 시대적 불안감을 미륵하생신앙에 의지하려는 염원이 나타났다. 리(里)의 남녀노소가 망라되어 서원을 드리는 비문에서 판독이 가능한 것은 불과 6행인데, 이가 빠져 내용은 아래와 같다.

 

宣德二年 丁未八月 十月立碑(선덕2년 정미팔월 시월입비)

里中古老 男女幼兒(리중고로 남녀유아)

□□□功西吉述浦(□□□공서길술포)

埋香□灣五里來世(매향□만오리내)

彌勒當來初會各(미륵당내초회각)

□□香(□□향)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