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아메바

대빈창 2013. 8. 23. 05:39

 

 

책이름 : 아메바

지은이 : 최승호

펴낸곳 : 문학동네

 

25 나는 간빙기의 인간

 

나는 간빙기(間氷期)의 인간이라고 한다. 거대한 얼음의 시간과 얼음의 시간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크로마뇽인들은 빙하기에도 살아남았다. 대단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다 죽었다.

 

25-1

나는 지구온난화 시대의 인간이다. 북극의 얼음이 녹고 해수면이 높아지는 불길한 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마당으로 부엌으로 밀려들어오는 바다. 투발루 사람들은 섬을 떠났다. 하지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25-2

냉장고 문이 열리면서

북극곰들이 걸어나오는 일은 없는 것일까

냉장고 문이 닫히면서

남극의 펭귄들이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는 것일까

 

25-3

온몸이 눈송이뿐인 새를 설붕(雪鵬)이라고 하자. 설붕은 무척 크다. 우리가 한 조각 파도라면 설붕은 해일이요 우리가 한 송이 눈이라면 설붕은 거대한 눈보라다. 이런 설붕도 지구온난화에는 미쳐버려서 머리가 비틀린 새처럼 뒤집힌 채 날아다니며 지구 곳곳에 기상이변을 일으킨다.

 

66 ~ 67쪽을 그대로 옮겼다. 이 시집은 한 쪽이 네 편으로 분할되었다. 짝 쪽수의 일련번호와 소제목은 고딕이다. 본문의 글씨보다 작은 詩行들은 시인의 앞선 시집들 12권에서 58편의 시를 골라 발췌했다. 홀 쪽수는 이를 토대로 한 발상을 3 ~ 4가지로 변주했다. 그러기에 시편들은 시(詩)알에서 여러 마리의 애벌레 시들이 어떻게 깨어나는지를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시를 쓰려는 문학도들에게 창작의 한 전범을 보여주었다. 내용도 파격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형식도 파격이다. 시집이 소설책보다 크다. 정확히 판형을 두 배로 키웠다. 책의 왼쪽 모서리를 묶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넘기던 방식을, 가로로 눕혀 아래쪽에서 위로 시집을 넘겨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사철방식도 백지를 꿰매 옛 서책을 따랐다. 재질도 습자지처럼 반투명하다. 문학평론가의 해설도 보이지 않았다. 이 시집은 문학동네시인선 1권으로 특별판이다. 시인의 말이 눈길을 끌었다.

“나사(NASA)는 비소(As)를 먹고 생존하는 새로운 생명체의 존재를 발표했다. ······. 비소를 먹고 사는 그림자 생명체가 있듯이, 낱말이나 이미지를 먹고 자라나는 언어 생명체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을 아메바(amoeba)라고 불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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