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살아남은 자의 아픔
지은이 : 프리모 레비
옮긴이 : 이산하
펴낸곳 : 노마드북스
수천의 가면을 쓴 그들의 목소리는 / 소름 끼치도록 부드럽고 온유했지. /그들은 밤마다 내 영혼을 갉아먹는 맹수들이었네.
「갈릴레오」(71쪽)의 일부분이다. 시를 함민복의 「절하고 싶다」에서 처음 만났다. 다행히 프리모 레비의 시집이 앞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스러운 일이다.”
옮긴이가 눈에 익은 이산하였다. 1987년 3월 제주도 4·3사건을 다룬 장편 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하여 필화사건을 겪었던 시인.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담요를 짰다. 금니로 금괴를 만들어 전쟁자금을 마련했다. 화장한 재는 정원과 채소밭의 비료로 사용했다. 며칠에 한 번씩 시체 소각실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프리모 레비는 1919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하의 이 땅에서 3·1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1941년 토리노대학 화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943년 이탈리아를 점령한 파시스트에 맞서 빨치산에 가담했다. 체포되어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5년 10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수용소의 평균 생존기간은 3개월이었다. 레비가 탄 아우슈비츠 행 화물칸 45명중 생환한 사람은 레비까지 4명이었다.
프리모 레비는 지옥에서 살아나온 뒤 자신이 겪고 본 지옥의 참상과 인간의 본질을 시와 소설, 회고록 등 다양한 형식의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주기율표』, 『지금이 아니면 언제?』. 시집은 3부에 나뉘어 59편과 편역자 해설로 「단테의 지옥을 통과한 오디세우스처럼···」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해설의 부제는 - ‘생각하지 않는 죄’와 ‘의심하지 않는 죄’에 대해 - 다. 유대인 대학살 총책임자 1급 국제전범으로 처형당한 아돌프 아이히만은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는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하지만, / 우리 인간은 아니다. / 반란의 씨앗에다 지능까지 높다는 그 멍청한 인간들은 / 항상 불안하고 탐욕스런 나머지 마구 짓밟고 파괴해왔다. / 조만간 울창한 아마존 숲과 삶이 꿈틀거리는 이 세상 /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인간들의 가슴까지 / 모조리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인생연감」(123쪽)의 일부분이다. 시는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가 투신자살 직전에 마지막으로 쓴 시로 유서가 되었다. 지옥의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인간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찾지 못하고 완전히 절망했다. 디아스포라 서경식은 이렇게 적었다.
“쁘리모 레비는 우리의 미래를 위한 증인이었다. 그런데 ‘이편’의 세계, 즉 우리의 세계는 증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에도 무심했던 것이다.··· 옅은 어둠 속 공간에 몸을 던진 쁘리모 레비는 자기 자신의 육체를 돌바닥에 내동댕이침으로써 우리의 천박함을 산산이 깨부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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