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시금치 학교

대빈창 2013. 11. 13. 07:41

 

 

책이름 : 시금치 학교

지은이 : 서수찬

펴낸곳 : 삶이 보이는 창

 

작가 안재성을 생각했다. 자연스레 출판사 삶창의 책들을 뒤적였다. 구로지역의 진보적 문인들이 공동체 문화 복원을 꿈꾸며 세운 출판사. 잘 팔리지 않는 시집들 중 그래도 대중적으로 알려진 노동자 시인 송경동의 데뷔시집 ‘꿀잠’을 떠올렸다. 시집들의 차례를 건성으로 훑었다.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연작 시편들이 눈길을 끈다. 만인보는 고은의 대하시집 제목이 아닌가. 더구나 해설은 맹문재의 ‘萬人譜 시학’이다. 한때 시뻘겋게 쇳물이 끓어 넘치는 용광로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던 현장 노동자 출신의 시인 교수. 책장에는 그의 시집 ‘사과를 내밀다’가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 시집은 시인이 등단한 지 17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그리고 나는 6년이 지나서야 시집을 펼쳤다. 앞날개에 적힌 시인의 간단한 이력을 살피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동해방문학’ 1989년 시인이 시를 처음 발표한 매체다. 박노해, 이정로의 글이 많이 실려 사노맹의 준 기관지로 알려진 이 월간지는 정간과 복간을 거듭하며 89년 4월부터 91년 1월까지 20개월 동안 10권을 냈었다.

 

폐수가 된 저수지에 / 누군가 낚시를 하고 / 기형의 희망만 간판이 되는 곳 / 하루 종일 기다려도/ 낙타는 두세 번 지나칠 뿐 / 한 번 출애굽한 서울 땅을 못 잊어 / 주말이면 텅 비어 가득 차는 곳 / 식솔을 거느리고 / 협궤의 구멍만 깊어지는 / 이사가 끊이지 않는 곳 / 살아가기보다 / 그냥 살아지는 곳.

 

‘안산에는 안산 사람이 안 산다(82쪽)’의 부분이다. 그 시절 나는 안산 중앙동의 사회과학서점에서 노동해방문학을 기다렸다. 그리고 특근 없는 주말이면 협궤열차를 타고 바람을 쏘였다. 짐만 되는 노동해방문학과 사회과학 책들을 노동자문학회에 남기고 나는 91년 구로로 적을 옮겼다.

 

최관식, 도두리 가수 정태춘 박은옥, 조선례 할머니, 김지태 이장, 김순득 할머니, 이상열 도두리 이장, 김양분 할머니, 방승률 할아버지, 김택균, 김월주 어머니, 솔부엉이 우는 까닭, 들사람들집 포도나무, 방효태 할아버지, 정태화 할아버지, 민병칠 할아버지, 황새울 들풀, 김영녀 할머니, 신종원, 이민강 할아버지, 황필순 할머니.

 

4부 연작시 ‘대추리 도두리 만인보’ 20편의 부제다. 시인은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투쟁 현장에서 눈물을 쏟으며 시를 썼다. 2006년 5월 4일 대추리는 점령당했다. 주민들은 평화적 생존권 불복종 투쟁을 펼쳤다. 하지만 주민들은 4년간의 투쟁에 지쳤다. 농사를 짓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2007년 3월 25일 935일째 마지막 촛불행사가 열렸다. 대추리의 마지막 날 400여 명이 모였다. 대추리에서 쫓겨 난 주민들은 도시 변두리의 맨션에서 빈민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가공할 폭력을 동원해 평화롭던 한 농촌 마을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미국의 전쟁기지가 들어섰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행복한 만찬  (0) 2013.11.18
시민과학자로 살다  (0) 2013.11.15
포도밭 편지  (0) 2013.10.21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0) 2013.10.18
붓다를 죽인 부처  (0) 2013.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