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나팔꽃을 세다

대빈창 2013. 9. 23. 07:39

 

 

 

“내가 피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나팔꽃이 피어 있을 뿐인데, 나는 마치 내가 피어나는 것처럼 분발했다.”

 

‘여기에 사는 즐거움’의 한 구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처마 아래에 놓인 화분의 나팔꽃을 세는 것이 야마오 산세이의 즐거움 이었습니다. 1977년 그의 온 가족은 도쿄에서 남쪽 작은 섬인 야쿠 섬으로 이사를 합니다. 야쿠 섬의 크기는 제주도의 5분의 1입니다. 25년 동안 그는 소박한 섬 생활을 하다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다행히 강원도 산중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최성현을 통해 야마오 산세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지역주의(bio-regionalism)는 자연을 물건으로 간주하며 착취해 온 삶을 버리고,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인 것을 깨닫고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모든 생명,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까지 소중히 여기고 돌보는 방식으로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은이와 옮긴이의 삶입니다.

제가 작은 섬 주문도에 터를 잡은 지 8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막내 기질이 강해 의지가 약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단순소박한 삶을 꿈꾸지만 불현 듯 온 몸을 감싸 안는 외로움에 뼈가 시릴 때가 간혹 있습니다. 늦가을 낙엽지고 알몸의 나무들이 찬바람에 몸을 떨 때 섬 풍경은 황량하기 그지없습니다. 서글프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유혹을 따라 자신을 소비하고 싶어도 섬은 네온사인 불빛 하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찬바람이 대기를 찢는 소리가 들리면 책갈피를 넘기는 손길은 바빠집니다. 저의 독서가 남독(濫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저의 산책은 한 시간 정도 걸립니다. 집 뒤를 돌아 봉구산 자락을 타고 해변으로 향합니다. 대빈창 해변의 제방 끝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이 저의 산책길입니다. 추석연휴 마지막 날. 여명이 터오는 것을 보며 길을 나섰습니다. 셀 수 있을 정도의 빗방울이 돋습니다. 폐그물을 두른 고라니 방책을 나팔꽃이 덮었습니다. 손가락을 꼽으며 나팔꽃을 세어 나갔습니다. 굵은 빗방울 하나가 저의 이마를 때렸습니다. 선뜻합니다. 쭈그리고 앉았던 저는 서서히 무릎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대빈창을 아시는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쉼플레가데스  (0) 2013.11.01
아버지, 자연으로 돌아가시다  (0) 2013.10.02
생태 섬을 향한 한 걸음  (0) 2013.09.09
DMZ은 생명의 땅이다.  (0) 2013.08.02
꿩의 이소를 안개가 덮어주다.  (0) 2013.0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