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겨우 참았을 것이다
처자식이 딸린 몸이라 늘 과묵했을 것이다
초지일관 소시민처럼 무력했을 것이다
일반적인 유권자답게 어리석었을 것이다
철저히 비겁하거나 비굴했을 것이다
설마 좀 부끄럽기는 했을 것이다
행여 자식들한테 들킬세라 체면은 늘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애는 끊어지고 심장은 자칫 터져버릴 뻔 했을 것이다
그럴수록 생활은 더 위축되고 경직됐을 것이다
가끔 화난 얼굴로 이렇게 한마디 툭 던지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 집구석 꼬락서니 하고는
아내나 자식들은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혼자 주절거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 이제 처자식 때문에 조아리고 굽실거리는 게 버릇이 되었는데
- 이 세상의 그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 강한 놈 앞에 서면 어김없이 처자식의 눈망울부터 떠오르는 줄도 모르면서
하지만 말로는 차마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저 오장육부에 울화로만 켜켜이 묵혀두었을 것이다
기껏 파고다공원 돌계단에 건조사한 양치식물같은 노인으로 전락하거나
이승의 막장으로 홀로 떠밀려날까 죽을 힘을 다해 장판지에 붙어 지내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러다 끝내 인격은 심근경색으로, 간경화로, 뇌졸증으로, 위암으로, 치매로 돌변하는 봉변이나 겪었을 것이다
돌연사하거나 객사하거나 비명횡사하는 아버지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렇게 기어이 장렬하게 가장의 최후를 맞이할 게 뻔 한 운명일 것이다
너의 아버지나, 나의 아버지나, 우리의 그 모든 아버지들은
다 그런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처자식을 먹여살렸을 것이다
오로지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아버지도 밥이든, 술이든 먹었을 것이다
이토록 무명의 중장년이나 노인으로 늙으려뎐 계획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동안 처자식 이하 너희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 놀려댔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혁명의 그날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을 것이다
그날 쓰려고 이런 심한 말을 작정하고 준비해두었을 것이다
물론 한 번도 쓰지 못하고 사망할 확률도 매우 높지만
- 야, 이놈들아, 이 나쁜 놈들아, 이 짐승같은 놈들아
- 아버지의 미완의 혁명 / 정기석 -
P. S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이다. 아버지가 잠드신 모과나무는 바람꼬지에 터를 잡아 잎사귀를 거의 떨구고, 가지 끝마다 새 잎을 매달았다. 색색의 봉숭아 꽃만 만발했다. 막걸리를 따르자 봉숭아 씨주머니가 탁! 탁 ! 터졌다. 텃밭에서 사시는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는 그렇게 뱀이 싫어하는 봉숭아만 지천으로 키우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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