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사를 오르는 길은 한폭의 산수화처럼 맑고 정갈했다. 겨우내 쌓인 눈이 산자락을 솜이불로 덮었고, 헐벗은 잡목들이 빼곡히 서서 한겨울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계곡길을 어느만큼 오르자, 산중에 구멍가게가 자리 잡았다. 처마에 덧이은 투명 비닐포장에 떡볶이, 햄버거 등이 쓰인 꼬리표가 바람결에 휘날렸다. 다져진 눈길을 조심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난데없이 길과 마주한 창문이 열리면서 ‘표를 내라’는 중년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검게 썬팅한 창문으로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손만 내밀어졌다.
“표가 없는데요, 매표소에서 그냥 가라고 해서...”
“신도세요”
“아닙니다”
“오늘이 입춘이라, 신도로 알고 표를 안받은 것 같네요.”
그는 도둑질하다 들킨 심정으로 관람료를 건네주고 산길을 재촉했다. 매표소 앞에서 갸우뚱거리던 그의 의문이 풀린 셈이다. 적막하던 산중에 돌연 낙숫물 소리가 들려왔다. 구성폭포였다. 떨어지던 물줄기가 그대로 얼어붙어 빙벽을 이루었다. 얼음기둥 안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폭포가 떨어지는 소의 가장자리는 얼음이 얼었고, 절벽밑의 파란물이 보는이의 한기를 돋우었다. 구성폭포 주변의 거대한 바위들이 묵직함을 포근한 눈이불속에 감춘 것을 보며, 그는 표암 강세황의 ‘영통동구도’를 떠 올렸다. 구성폭포에서 몇걸음을 떼자, 세월먹은 이층누각이 지붕에 눈을 인채 길손을 맞았다.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나 세월먹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제법 높은 1층 기둥에 기댄 술박스가 2층 바닥까지 쌓였다. 누각으로 향하는 돌계단위에 현수막이 걸렸는데 ‘환영 민박 M․T 고려산장’이라 씌어있다.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누각옆에 졸렬하게 일렬횡대로 지은 민박집의 손님 술청으로 전락한 모양이었다. 청평사가 쇠락의 길을 걸으면서 저 고풍스런 누각도 같은 운명에 처한 것인지도 몰랐다.
구성폭포를 지나 청평사를 찾는 길손에게 먼저 얼굴을 내미는 유물은 영지(影池)와 진락공 부도다. 두 유물은 절로 향하는 산길을 마주보고 서있다. 낮으막한 돌담장안에 갇힌 부도는 팔각원당형의 양식으로, 키가 고작 180cm로 소담스럽다 못해 귀여움마저 느껴졌다. 부도의 주인공은 고려 선종6년(1089)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미련없이 속세를 버리고 청평산에 들어와 선을 닦은 진락공 이자현이다. 담장안에는 근래에 조성된 또다른 부도가 거대한 몸짓을 자랑하지만, 생경스러움에 그는 발길을 돌려 영지로 향했다. 영지는 이자현이 오봉산 자락 전체를 계획적으로 조성한 고려정원 중의 일부로 ‘원형 그대로 보존된 고려시대의 연못’으로 조사결과 밝혀졌다. 연못은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을 고려해 사다리꼴로 석축을 쌓았다. 바로 곁을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들여 오봉산이 비치도록 했다. 연못에는 삼봉산을 상징하는 큰 바위돌 세개를 앉혔고, 사이사이에 갈대를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길손의 눈에 얼어붙은 연못에 쌓인 눈만 가득해 아쉬움만 밀려왔다. 영지를 벗어나자마자 그의 눈에 기묘한 생김새의 바위가 눈에 뜨였다. 이땅 이곳저곳에 기자신앙의 대상물로 자리매김한 여근석을 닯았는데, 허벅지 아래는 땅에 묻히고, 허리를 굽힌 여인네의 풍만한 뒷엉덩이 형상이었다. 바위에 쌓인 눈이 허리춤에 걸쳐진 흰드레스처럼 보여 한층 도발적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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