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청평사淸平寺의 입춘立春 - 4

대빈창 2014. 2. 5. 07:10

 

멀리 해발 779m의 골산인 오봉산이 허리자락에 잔설을 두른 채 머리의 암봉을 드러냈다. 여기서부터 확트인 공간이 길손을 가람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돌을 잘 다듬은 돌계단에 올라서면 거대한 두 그루의 소나무가 일주문처럼 길손에게 여기부터 경내임을 알려주었다. 청평사는 강원도 기념물 제55호로 고려 광종24년(973)에 ‘승현선사’가 창건하고, ‘백암선원’이라 불었으나, 그리 오래지않아 폐사되었다가 문종 22년(1068)에 이개가 재건하여 ‘보현원’이라 했다. 그뒤 이개의 장남 이자현이 산이름을 청평(淸平)이라 고치고, 여러채의 전각을 짖고 문수보살에서 연유한 ‘문수원’으로 개칭했다. 경내에서 길손을 먼저 맞아주는 것은 윤회전생을 깨우치는 보물 제164호인 ‘회전문’이다. 회전문은 가람의 삼문(三門)중 중문인 천왕문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면 3칸중 가운데의 넓은 한칸이 통로로 사용되고, 양옆의 두칸이 여느 절에서나 보기 마련인 사천왕상을 안치할 공간으로 비좁아 의문이 들었다.

소양강댐이 들어서면서 ‘호반속의 산사’로 운치있는 풍광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을 받아서인 지 청평사에도 ‘중창불사’의 바람이 일었다. 영주 부석사의 대석단을 연상시키는 청평사의 고색창연하고 정교한 축대위에 신축 전각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었다. 청평사의 전각들은 한국전쟁때 소실되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전각이 무려 221칸의 거찰이었다고 한다. 옛 영화에 대한 향수일까, 스님의 염불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회전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국보였던 극락전이 한국전쟁때 불탄 자리에 대웅전이 근래에 조성되었다. 나그네의 눈길은 대웅전 계단의 소맷돌에 머무른다. 무지개처럼 공굴린 정교한 조각이 소맷돌 끝에 새겨졌는데, 연잎에 둘러싸인 문양은 태극이었다. 태극 도형은 중국 송의 주돈이(1017 ~ 1073)가 도상화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우리나라에 그보다 400년 앞선 진평왕 50년(628)에 창건된 경주 감은사터 석물에 태극문양이 장식으로 사용됐다. 바탕이 성리학인 태극 도형이 사찰에서 장식문양으로 사용된 이유는, 태극이 지닌 상반, 융합의 사상과 원리에 기인한다고 한다.

그는 대웅전뒤 극락보전과 산신각이 자리잡은 석단에 올라섰다. 시간이 지나면서 입춘을 맞아 절을 찾은 사람들로 경내는 북적였다. 외래종교인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되면서, 민족고유의 토속신앙을 포용한 것을 습합현상이라 한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우리민족의 토속신이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우리민족은 산악을 숭배하여, 곳곳에 산신당을 세우고 소원을 빌었다. 이에 불교가 국가종교로 발돋음하면서 민간신앙의 하나인 산신을 호법신중으로 격상시키고, 산신각을 세워 민중들을 불교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다. 입춘을 맞아 산신각을 찾은 신도들의 손에는 산신에게 공양할 제물들이 한아름 안겨있었다.극락보전앞에 보호수로 지정된 주목 한그루가 그 위용을 자랑했다. 수령 800년에 키가 10m이고, 둘레가 1.5m인 이 노거수는 청평사의 옛 영화를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주목을 둘러싼 철책 난간마다 키자랑을 하는 작은 돌탑 수십여기가 앙증스럽다. 절 뒤편의 환적당과 설화당부도 그리고 적멸보궁터에 발길이 미치지 못한 채 그는 경내를 벗어나려 회전문앞에 섰다. 돌축대밑 너른 마당에 족구장이 마련되었고, 왼편 공터에 범종각이 새로 들어섰는데 한국종의 전형을 이어받으려는 노력이 종문양에 새겨져 낮설지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