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코뿔소는 죽지 않는다
지은이 : 최승호
펴낸곳 : 도요새
무뇌아를 낳고 보니 산모는 / 몸 안에 공장지대가 들어선 느낌이다. / 젖을 짜면 흘러내리는 허연 폐수와 / 아이 배꼽에 매달린 비닐끈들. / 저 굴뚝들과 나는 간통한 게 분명해! / 자궁 속에 고무인형 키워온 듯 / 무뇌아를 낳고 산모는 /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의심스러워 / 정수리 털들을 하루종일 뽑아댄다.
‘공장지대’(57쪽)의 전문이다. 그로테스크한 초현실주의적 묘사인가. 아니다. 이 땅의 현실이다. 시편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과다한 피폭에 노출된 핵발전소 노동자 아내의 출산을 떠올렸다. 불나방처럼 현란한 네온사인의 밤문화에 길들여진 현대 도시인들은 죗값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시집을 손에 넣고 퍼즐은 완성되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출판사 도요새를 만들었다. 출판사의 로고는 긴 부리와 긴 다리를 가진 새를 닮았다. ‘도요새문고’ 1차분으로 3권의 책을 2000년 5월에 냈다. 생태출판사답게 책들은 재생용지를 사용했고, 속면지도 넣지 않았다. 문고 1 ‘지구에서 사라진 동물들’은 20세기 절멸된 동물들을 다루었고, 문고 2는 작가 최성각의 생태엽편소설집 ‘사막의 우물 파는 인부’다. 바보상자지만 초저녁 ‘동물의 왕국’에 곧잘 눈길을 주던 나는 첫 책을, 20대 초반 젊은 객기로 탄광촌을 기웃거리던 인연으로 최성각의 등단작 ‘잠자는 불’에 필이 꽂혔던 인연으로 나는 둘째 책을 손에 넣었다. 문고 3 생태시선집을 뒤늦게 발견했으나 손에 넣기가 요원했다. 작은 외딴섬에 둥지를 튼 나는 대도시의 중고책방을 소요할 여력이 없었다. 온라인 서적은 모두 품절이었다. 운이 닿았는지 온라인 중고서적을 통해 13년 6개월만에 시집을 만났다. 시인의 생태 환경에 관한 72편의 시선집이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사물은 원래의 모습을 닮아가는 지 모르겠다. 흰 책술은 누렇게 변해 나뭇잎 색을 띠고 있었다. 다행히 코뿔소는 죽지 않고 나를 기다렸다. 표지 이미지가 재미났다. 아기코뿔소의 코가 알콜중독자처럼 빨갛다. 나에게 인류문명에 대한 경고등처럼 보였다. 마지막 시편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123 ~ 128쪽)는 동강 유역에 자생하는 산림생태계를 길게 나열하고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아무르장지뱀이나 / 용수염풀, / 아니면 바보여뀌나 큰도둑놈의갈고리나 괴불나무로 / 혹은 더위지기로 태어났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 그랬더라면 내 이름이 어떻든 / 이름의 감옥에서 멀리 벗어나 / 삶을 사랑하는 일에 삶이 바쳐졌을 것이다. / 무덤에 핀 할미꽃이거나 / 내가 동굴에서 날개를 펴는 / 관박쥐라 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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