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지은이 : 박경리
그린이 : 김덕용
펴낸곳 : 마로니에북스
1969년부터 1995년까지 26년에 걸쳐 완성된 4만 여장 분량의 한국문학 기념비적인 작품. 시간적으로 1897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 사회의 반세기에 걸친 5부작 대하소설. 극악스러울 정도로 모진 이 땅의 근·현대사 격동기의 각 계급의 상이한 운명에 처한 6백 여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 바로 토지다. 작가 박경리하면 한국 사람들은 토지(土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과 함께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16권의 대하소설을 나는 잡지 못했다. 진득하지 못한 가볍기까지 한 조급성 때문이었다. 2008년 작가가 타계한 뒤 나는 뒤늦게 유고시집을 손에 넣고 뒤돌아보았다. 기억나는 책이 아주 오래 전 ‘김약국의 딸들’이 고작이었다. 나의 우둔함이여. 작가는 살아생전 3권의 시집을 냈다.
이 시집은 유고시집이다. 김영주 따님의 서문과 작가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39편의 시, 그리고 작가의 젊은 시절과 말년 원주 토지문학관의 일상을 담은 30여 컷의 사진. 스물대여섯 점의 그림이 같이 실렸다.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나무판에 그린 화가 김덕용의 박경리를 테마로 한 작품들이다.
나는 시집에서 4부의 시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시편들은 산업자본주의가 망그러뜨린 생태계와 지구온난화를 자초한 인간의 탐욕, 그리고 현실과 괴리된 지식인의 모순, 핵폭탄 등을 다루었다. 작가는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생태주의자였다. “우리는 자연의 이자로만 살아야지, 원금을 까먹으면 끝이야.”
날이 밝고 보다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 폐결핵인 아지매의 약으로 / 고양이 새끼의 탯줄이 필요했고 / 아지매는 고양이를 달래고 달래어 / 탯줄을 얻었다는 것이다 / 얼마나 다행이냐고도 했다
‘홍합’(27 ~ 29쪽)의 5연이다. 나는 여기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갔다. 폐병쟁이. 언덕 위 초가집이었던 우리집과 옆집 기와집은 마당이 서로 길게 연결되었다. 성이 민씨였다. 할머니는 육손이였는데 생강을 기가 차게 손질하셨다. 김장을 담글 때 할머니는 우둘두둘한 생강의 껍질을 칼도 없이 말끔하게 벗겨냈다. 엄지손가락이 곁가지가 붙어 새총처럼 생겼다. 손자가 나와 동갑이었는데 학교에 가질 않았다. 동갑내기는 겨울이 가고 햇살이 퍼지면 툇마루에 앉아 종일 해바라기를 하는 것이 일과였다. 마당과 텃밭을 경계 지은 작은 관목들의 이파리에 이슬이 채 가시기도 전에 동갑내기의 목젖이 연신 꿈틀거렸다. 아주 재게 놀리는 손가락에 햇살을 미처 받지 못해 아직 굳어있는 청개구리의 작은 몸뚱이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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