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문을 나서면 대뜸 덩치큰 정면 9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만세루가 코앞을 막아섰다. 전북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된 만세루는 아름드리 통나무를 다듬지않고 그대로 부재로 사용한 단층건물로 가람의 다른 건물들을 다짖고 남은 목재로 완성했다. 만세루를 돌아서면 보물 제290호인 대웅보전이 낮은 축대위에 자리 잡았다. 계단아래 7층석탑을 비롯한 석물들이 일렬횡대로 줄지었다. 내소사 대웅보전의 꽃창살 분합문보다 격이 떨어지지만 꽃살 문양이 제법 화려했다. 정면 모서리에 세월먹은 배롱나무 두그루가 한겨울에 살찐 몸매를 드러냈다. 네 모퉁이 추녀를 활주로 받쳤다. 좌측으로 멀찍이 영산전이 자리 잡았다. 우측에 대웅보전에 연이어 관음전이 있는데 이곳에 보물 제279호인 금동보살좌상을 모셨다. 조선성종 7년(1476)에 만들어진 보살상은 일제강점기때 탈취당한 것을 1940년에 되찾아 이곳에 모셨다. 우리 역사의 치욕을 몸소 경험한 보살님이었다. 대웅보전 뒤 산록에 천연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된 동백나무숲이 사시사철 푸르름을 자랑했다. 현재 동백나무숲은 순림에 가까운데 가람과의 경계에 사람의 손길이 닿지못해 잎사귀를 다 떨군 새빨간 홍시가 가지가 부러지게 매단 감나무들이 구역지었다. 아쉬운 것은 안내판이 돌판매질 과녁으로 전락해 애처로웠다. 심한 마마를 앓고난 곰보얼굴로 땅바닥에 조약돌이 수북히 쌓였다.
나는 희원대상으로 역사적 파랑새가 현신한 현장으로 가기위해 배낭을 들러맸다. 계류에 놓여진 다리를 건너 흙길을 따라 무조건 발길을 내딛는데 적막한 겨울 산중에 사람 그림자하나 없었다. 꽤 먼거리를 올라와 문득 이정표하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혹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닐까 의구심에 고개를 드는데 맞은편에서 등산복 차림의 중년부부가 산길을 내려왔다. 길을 물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나에게 되물어왔다. 나는 할 수없이 선운사 경내로 다시 돌아왔다.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데 옆에 있던 젊은이가 ‘아직 물이 덜 데워졌다’고 일러 주었다. 그의 말대로 계류을 왼편에 끼고 산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너럭바위에 막힌 계곡물이 제 갈길을 찾아 몸을 비틀었고, 바위의 주름진 골마다 낙엽이 둥지를 틀었다. 조용한 겨울산에 벌거벗은 나무들만 시간의 흐름을 바람결에 내맡기고 있었다. 그 나무들에서 박완서의 ‘裸木’과 하드보드에 유채로 그린 서민화가 박수근의 ‘나무와 여인’이라는 그림을 떠 올렸다.
얼마쯤 오르자 계곡을 막은 취수보 옆 길가에 돌장승이 한기 서있다. 가슴께에 올라오는 키에 이마에 유두돌기가 있고,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조선후기 병자·임진 양란을 겪으면서 새로운 민중문화로 장승이 부상했다. 도솔암 가는 길의 장승에 대해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南行月日記’에서 길거리 미륵으로 유추했다. 취수보를 지나자 계류에 다리에 놓였고, 건너 매점이 있었다. 빵과 음료수를 배낭에 간추리는데 한구석에 자리한 자판기에서 그가 고개를 내밀었다. 도솔암 가는 길을 찾지못해 선운사 경내에 다시 들렀을때 길을 일러준 젊은이였다. 그는 선운사와 부속암자에 설치된 자판기의 종이컵을 채우는 중이었다. 도솔암 산길 2.2km를 운좋게 그의 차를 얻어타고 쉽게 올랐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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