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나그네는 파랑새를 보았는가 - 12

대빈창 2014. 6. 30. 06:04

 

 

동학농민혁명 발발 2년 전인 1892년 손화중은 이서구가 이미 열어 보았으니 벼락살이 없어진 것을 알고 대나무 발판을 엮어 비결을 꺼냈다. 이 사건으로 동학군 수백명이 무장현감에 잡혀 고초를 당하고 그 중 3명이 사형을 당했다. 이 일이 있은후 손화중 진영에 수만명의 새로운 교도가 몰려들었다. 지금도 마애불 명치에 백회로 봉한 자국이 있다. 그 속에서 무엇이 나왔든 썩어빠진 세상을 갈아 엎어보자는 농민군에게 그것은 파랑새의 현신이었다.

나는 역사적, 혁명적 파랑새 현신의 현장인 도솔암을 뒤로하고 하산길을 재촉했다. 차를 타고 올라 지나친 곳이 두 곳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354호인 장사송, 일명 진흥송은 수령이 6백년인 소나무로 지상에서 1.5m되는 높이에서 8개의 가지를 뻗쳐 거대한 우산같기도 했다. 나무 이름은 이곳 옛 지명의 장사현에서 유추된 것으로 보았다. 옆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 중애공주와 수도했다는 천연바위굴 진흥굴이 있다. 굴 깊이는 10m, 높이는 4m로 안구석에 돌무더기가 쌓였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맨 안쪽에 촛불 예닐곱개가 불을 밝혔다.

선운사 경내를 지나쳐 일주문을 향하니 계류가 따라오고, 침엽수림 한가운데 부도밭이 있었다. 비문 12개, 부도 20개가 곧게 뻗은 침엽수 줄기 사이로 언뜻 보였다. 뒤쪽 삼층석탑이 자연석 위에 서있는데 기단과 몸돌을 시멘트로 접착시켰다. 근래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석탑일 것이다. 이곳에서 유심히 볼 비문은 ‘백파선사비’다. 백파 긍선선사(1767 ~ 1852)는 초의선사와 선문의 요지에 대한 토론을 벌여 당시 침체됐던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어 선종의 중흥주로 일컬어졌다. 비문은 추사 김정희가 행서로 지었는데 앞면은 ‘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大用之碑’다. 뒷면은 화엄종주, 대율사, 대기대용이라는 말을 쓴 연유와 삶을 기리는 명(銘)을 새겼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부기했다.

 

가난하기는 송곳 꼿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