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뜬돌과 낮꿈 - 1

대빈창 2014. 7. 7. 07:13

 

말복 날. 이른 아침부터 나는 부석사에 있었다. 황금연휴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 끝에 선묘설화가 가람 곳곳에 남아있는 천년고찰 부석사와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이라는 믿음직한 훈장을 단 소수서원이 이웃한 그 곳. 경북 영주로 나는 배낭여행을 떠났다. 부석사가 처음 나의 인식 속으로 들어온 것은 고미술 전문서적 출판사인 학고재에서 출간된 전국립중앙박물관장 故 최순우의 글모음집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책을 잡고부터였다. 초겨울 안개비를 맞으며 찾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스산한 정취를 미문으로 표현한 짧은 글이 어느새 나의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우리 곁으로 다가온 무수한 책들 속에 부석사는 온전히 제 얼굴을 내밀었다.

청량리역 무궁화호에 나는 몸을 실었다. 행정구역 개편에 눈이 어두운 나는 열차 안에서 풍기라는 지명과 고려 유학자 안향 그리고 주세붕에 생각을 골몰하였다. 어느 중앙지의 테마여행 시리즈에서 영풍 부석사를 소개하면서 둘러볼만한 곳으로 소수서원을 들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상단 모서리에 조그맣게 안내지도를 그린 것이 떠올랐는데 나는 풍기에서 내려 소수서원으로 눈맛을 익힌 다음 본격적인 답사로 부석사를 향하기로 했다.

풍기역에서 내렸으나, 나의 주머니 사정은 빈약했다. 아뿔사! 역앞 정면대로를 따라 내려오다 상점주인에게 은행 365일 코너를 물으니 풍기에 없고 영주에 나가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낭패를 당한 나의 뇌리에 승차표에 표기된 도착역 영주가 자꾸 떠올랐다. 할 수없이 풍기역 앞에서 영주행 택시를 탔다. 기사 아저씨는 나의 행색을 보더니 목적지가 어디냐고 물었다.

“영주를 들러 돈을 찾아 소수서원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짙은 경북내륙 사투리를 구사하는 기사아저씨와 나는 쉽게 합의했다. 영주시내 은행에 들러 일을 보고 택시로 소수서원으로 향하기로. 아저씨께 들은 긴요한 정보는 소수서원에서 부석사행 버스가 많다는 것이었다. 17:20. 나는 큼지막한 입간판이 서있는 소수서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 퇴계가 풍기군수로 임명되면서 명종의 친필로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는다. 면세특권을 받은 최초의 사액서원은 자리 잡은 위치가 고즈넉한 절집을 연상케 했다. 옹색한 매표소에서 관람권을 끊으니 표를 내어 주면서 문 닫을 시간부터 일러 주었다.

풍기는 이미지는 어쩔 수 없었다. 경내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아 준 것은 어이없게 당간지주였다. 서원 안의 마주보는 두 개의 돌기둥. 가까이 다가서니 안내판에 -보물 제59호 숙수사지 당간지주 -라고 명기되었다.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에 편승한 ‘절집을 서원으로’를 여실히 웅변하는 유물이었다. 배경의 잘생긴 소나무들도 당간지주를 둘러싼 보호철책 안에 있어, 석물과 솔잎의 푸르름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죽계천을 오른쪽에 두고 그리 높지 않은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경내로 들어서기 전 천변의 경렴정이 먼저 맞아주었다. 강당을 직방재, 장판각, 일신재가 에웠다. 시락재, 전사청, 학구재, 영정각이 조선시대 서원의 건물배치에 따라 제자리를 잡았다. 기품 있는 선비처럼 고졸하고 단아한 모습이었다.(계속)

 

p. s  이미지는 구글에서 빌렸다. 가장 오래 묵은 글을 마지막으로 포스팅하게 되었다. 카테고리 '배낭메고 길나서다'에 올릴 글은 이제 동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