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대빈창 2014. 3. 30. 07:12

 

 

 

책이름 : 꽃

지은이 : 윤후명

펴낸곳 : 문학동네

 

소설가 윤후명하면 나는 ‘원숭이는 없다’부터 떠올랐다. 돈을 지불하고 구입한 최초의 소설집이었다. 80년대 말 지방 소도시의 흔한 서점이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이나, 문학적 소양보다 단정적인 소설 제목에 끌렸을 것이다. 그리고 10년 전에 건성으로 읽었던 작가의 꽃에 대한 산문집을 다시 펴들었다. 이 책은 86개의 꼭지로 이루어졌는데, 사계절 별로 꽃의 식물학적 특성, 꽃에 얽힌 고사(故事), 문학 작품속의 꽃, 작가의 어린 시절 회상 등이 담겼다. “나는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10대 후반의 치기어린 마초 기질이었을까. 세상에 대한 불만이 낳은 자기기만이었을까. 아니면 아름다움에 대한 경멸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철부지의 악다구니였다. 가난으로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혔던 나는 울분을 마구잡이 술과 주먹질로 나날을 보냈다. 그 핏발 선 눈동자에 꽃이 들어 설수가 없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자락에 바투 등짝을 기댄 오래 묵은 시골집에 둥지를 튼 지가 5년이 넘었다. 산길로 이어지는 집 뒤 나지막한 고갯길이 슬라브 옥상과 키가 같았다. 경사면을 깍아 계단식 화단을 조성한 뒷울안에 어머니와 나는 하나 둘 화초와 나무를 가꾸었다. 명자나무, 감나무, 사철나무, 소나무, 철쭉, 영산홍은 전 주인의 손때가 묻은 나이 먹은 나무다.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박태기, 조팝나무, 매화나무, 모과나무를 새로 심었다. 그리고 뒷산에서 청미래와 으름 덩굴을 한 뿌리씩 캐와 덧처마 기둥에 기대었다. 매발톱꽃, 제비꽃, 할미꽃, 수국, 금낭화, 작약, 개양귀비, 원추리, 나리꽃, 상사화, 옥잠화, 국화, 도라지, 둥글레, 참취, 곰취 ······.

‘겨울이 지날 무렵 벌써 꽃망울이 발긋발긋 부푸는데, 이른 봄에 다섯장의 주홍빛 꽃잎이 서로 겹쳐 피어 더욱 탐스럽다.’(85쪽) 처마의 낙숫물 떨어지는 자리의  명자나무가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이다. 나는 아버지를 모과나무 발치에 모셨고, 어머니는 화사하게 무더기로 피어나는 명자나무꽃에 매혹되어 무덤자리로 정했다. ‘흰색, 빨강색, 자홍색 등 여러 빛깔의 꽃이 있으니, 흰 것만이 아편의 원료로 사용된다고 한다.’(104쪽) 김포의 언덕꼭대기 집. 어느 해 집 주변을 양귀비가 둘러쌌다. 어머니가 매일같이 뽑는데도 양귀비는 다음날이면 땅거죽을 밀고 올아왔다. 그중 몇 뿌리가 그늘에 말려 신문지로 둘둘 말아 안방 장롱위에서 겨울을 났다. 배앓이의 특효약이었다. ‘어릴 적에 산과 들로 돌아다니다가 할미꽃을 몇 번 집에 옮겨 심었으나 죽고 말았던 것은’(213쪽) 어머니와 나는 해를 걸러 뒷산 무덤 양지바른 터에 무더기로 피어난 할미꽃을 몇 포기 캐와 울안에 심었다. 매번 죽었다. 산성비 때문인 줄 알았으나 뿌리가 곧게 자라는 풀로 파내는 동안 뿌리 끝이 끊어져 죽은 것이다.

‘수선화는 겨울이 지나고 다른 식물보다도 잎이 먼저 돋는 식물에 든다’(42쪽) 올 봄 나는 수선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내 방 한 벽 해남 대둔사에 발걸음한 기념으로 손에 넣은 추사의 유명한 ‘茗禪’을 새긴 수건이 걸렸다. 추사 시절, 서울에서 보기 어려워 중국에 다녀 온 사신을 통해 구한, 귀물(貴物)인 수선화가 유배지인 제주 대정에 지천이었다. 추사는 제주민들이 이 귀한 꽃을 알아보지 못하고 소나 말의 먹이로 취급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 귀한 수선화가 이제 뒷울안을 봄이면 덮게 되었다. 지난 봄 몇 뿌리 얻자고 말을 건네자, 말도의 아는 분이 꽤 많은 비늘줄기를 지난 가을에 건네주면서 바로 땅에 묻으라고 일러 주었다. 지천명을 넘긴 나는 이제 화초나 나무를 뒷울안에 심고 그것을 완상하며 남은 삶을 은일자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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