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뜬돌과 낮꿈 - 4

대빈창 2014. 8. 27. 07:14

 

나는 조사당을 되돌아 나와 응진전과 자인당으로 향했다. 나이먹은 숲 그늘이 드리운 산길은 사람그림자 하나 없었다. 나는 새소리만 지저귀는 적막한 산길을 혼자 걷고 있었다. 문득 오솔길에서 마주쳤던 여자가 떠 올랐다. 찰나지간. 하지만 그녀의 옷매무새며 표정이 확연했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흰 피부, 짧게 커트한 머리 모양새,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청바지, 아! 허리에 주홍바탕에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블라우스 소매를 동였다. 엷은 보라색 티셔츠. 나는 머리를 저으며 응진전의 16나한상과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모신 자인당으로 들어섰다.

산길을 내려오자 무량수전 안마당에 관람객들이 꽤나 모여들어 사진촬영을 하거나 안양루 처마 앞 백두대간 연봉을 조망하고 있었다. 나는 현판이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전해오는 무량수전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세월의 무게가 덧 씌어진 고려시대 건물의 고풍스런 느낌은 무엇보다 빛바랜 단청이 주는 고색창연함에 있었다. 시인 고은은 ‘절을 찾아서’에서 부석사를 소개하면서 '의상의 화엄선풍이 몰아치던 곳'이라고 했다. 무량수전은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아미타불)이 여느 절과 달리 협시불 하나 없이 동향 정좌하고 있었다. 열 지어 서있는 내부 나무기둥들이 의상을 향해 경배하는 제자들처럼 보였다.

나는 무량수전 서벽 뒷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 부석을 바라보았다. 의상이 자신의 화엄 종지를 펼 터를 찾아 전국을 순행하다 마침내 이 곳을 발견했다. 미리 선점했던 무리배가 훼방을 놓았다. 그때 죽어서도 의상의 대업을 보필할 것을 다짐한 선묘아가씨가 폭과 너비가 1리나 되는 거대한 바위로 화해 방해자들의 머리위로 솟구쳤다. 그들은 당연히 흩어지고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했다. 절 이름은 이 뜬돌에서 유래했다. 나는 배낭속 메모노트를 꺼냈다. 수십 명이 올라앉을 넓적한 윗돌에 칡넝쿨이 제멋대로 자리를 잡았다. 몇 개로 이루어진 받침돌에 담쟁이가 기어 올랐다. 그때 노트를 긁적이는 나의 신경 틈새로 오솔길의 그 느낌이 감지되었다. 나는 뒤를 보았다. 아! 물방울무늬의 그녀가 부석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먼저 누구랄 것도 없이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카메라로 뜬돌과 국보 제17호 석등의 화사석에 돋을새김 된 보살입상을 담았다. 선묘가 화한 석룡이 꼬리를 석등 밑에 두고 S자형으로 몸을 뒤틀어 머리를 무량수전 아미타불상 밑에 뉘였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었다.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곧 극락세계가 아니었던가. 나는 보물 제249호 삼층석탑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선묘각 앞에 섰다. 햇살이 차츰 좁은 누각 안을 비쳐들었다. 선묘아가씨. 분명 선묘아가씨가 웃고 있었다. 낯익은 입 모양새로. 나는 안양루 밑 나무기둥을 지나 돌계단을 내려서 보장각으로 향했다. 보장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석축단 위아래에 따로 지어져 건물 내부에서 나무계단을 통해 연결되었다. 근래에 신축한 건물로 민도리 맞배집에 단청이 없어 소담한 맛을 풍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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