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메고 길나서다

병산서원에 다녀오다.

대빈창 2017. 9. 8. 07:00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1997, 창작과비평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 경북 북부』(1997, 돌베개)

『명묵의 건축』(2004, 안그라픽스)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3』(2006, 돌베개)

 

나의 뇌 주름에 병산서원 만대루을 입력시켜 한 번 가보라고 등태질한 책들이다. 굽이굽이 사행(蛇行)하는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병산서원에서 부용대까지 25분, 옥연정사에서 하회마을까지 15분이면 닿을 수 있다. 나의 발걸음은 30년이나 기다려야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80년대 중반으로 30년전 이었다. 나의 발길이 경북 내륙 안동에 닿았다. 그 시절 안동은 교통이 불편한 오지였다.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시외버스가 유일했다. 그때 하회마을 가는 길과 마을 고샅은 흙먼지 길이었다. 수령 600년이 넘었다는 마을 중앙에 위치한 삼신당 신목 느티나무와 유성룡의 종택 충효당(보물 제414호)과 풍산류씨 대종택 양진당(보물 제306호) 고택이 인상적이었다. 충효당에서 유달리 눈에 뜨였던 것이 서애(西崖)의 신발이었다. 요즘 속된 말로 하면 도둑놈 발이었다. 누군가 나의 물음에 답을 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정말 발이 컸다.” 마을을 휘감아돌아 낙동강이 부려놓은 백사장이 장관이었다. 나룻배를 탔다. 강이 마을을 감싼 하회마을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부용대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서애가 낙향하여 머문 옥연정사를 들렀다. 서애 유성룡(1542 ~ 1607)는 이곳에서 임진왜란 7년간의 기록인 『징비록(懲毖錄)』을 완성했다. 징비는 “미리 잘못을 뉘우치고 경계해서 뒤의 환란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나라가 왜적에 풍전등화의 위기였던 임진왜란 시절, 서애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의 앞날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암울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애는 정음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삼아 바다를, 형조정랑 권율을 의주목사로 삼아 육지의 방비를 맡겼다.

병산서원 가는 비포장 길이 정겨웠다. 왼쪽 벼랑아래 구불구불 흘러가는 낙동강을 보며 내려가는 언덕길이었다. 마주 오는 차가 보이면 얌전히 한 옆에서 길을 비켜 주어야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문을 열자 강변의 이름 모를 들꽃이 풍기는 향내가 진동했다. 주차장도 틈이 넓은 돌을 깔아 잔디와 앙상블을 이루었다. 진입로의 정겨움이 흥을 돋아 눈에 뜨이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지 몰랐다. 서원 입구의 잔디밭에 처녀 살결을 자랑하는 어린 배롱나무와 주먹만한 탐스런 열매를 매단 모과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사적 제260호 병산서원의 외삼문 현판은 ‘예를 다시 갖추는 문’이라는 복례문(復禮門)이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뛰어난 건축물 만대루(晩對樓)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학생들의 공부방인 동재와 서재가 마당의 한 축을 이루고, 중심 공간 입교당(立敎堂)이 마당 건너 정면에 위치했다. 왼쪽에 서원의 교장실인 명성재(明誠宰)와 오른쪽에 교무실인 경의재(敬義宰)가 앉았다. 서원의 영역은 두 군데로 나누어졌다. 입교당과 동·서재가 위치한 학생을 가르치는 강당 영역과 스승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 영역이었다. 사당에 서애와 셋째아들 류진(柳袗)을 모셨다. 1863년 철종 때 사액서원이 되었다. 197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하인들의 공간으로 서원의 살림을 책임지는 주소와 전사청, 그리고 달팽이 형상의 뒷간에 눈길이 갔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의 하이라이트는 낙동강 건너 병산을 병풍처럼 두른 만대루의 지붕선과 누각 지붕을 바치는 기둥의 사각 프레임에 꽉 차게 들어오는 낙동강 물길이다. 요즘 비가 잦아 강물은 수량이 풍부했다. 엄중한 유교의 격식을 지키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아낸 선조들의 지혜가 고마웠다. 답사객들은 하나같이 서원의 건축물을 뜯어보다, 서원 앞에 우뚝 솟은 병산과 그 앞을 흐르는 낙동강에 시선이 머물렀다. 자연(병산과 낙동강)을 건물 속으로 끌어들인 선조들의 혜안에 큰 감동을 받았다. 병산서원을 벗어나 하회마을로 향했다. 굳이 포장하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안동시의 문화행정이 탐탁했다. 하회마을 입구주차장 안동간고등어 전문음식점에서 아점으로 요기를 때웠다. 핸들을 꺾어 안동 시내로 향했다. 하회마을도 상업주의가 활개 치는 흔한 관광지로 전락한 것은 아닐까. 마을을 휘감고 도는 강물은 분명 녹조라떼로 혼탁해졌겠지. 나는 30년만의 하회마을 답사를 포기했다. 아름다운 추억이 훼손될까 두려웠다. 누군가 말했다. “21C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천박한 미적 감각으로 문화재 복원은 어불성설이다. 후손들을 위하여 차라리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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