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석단 아랫동의 댓돌에 등산화를 벗어놓고 들어섰다. 그때 스님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사람들은 남의 집에 올 때도 맨발차림이라니, 쯧쯧”
나는 화들짝 놀라 발을 내려다보았다. 보장각에 고려시대 화엄경각판(보물 제735호)와 조사당 벽화가 보관되었다. 사람들이 밀려들어 진열유물의 배치 순서대로 줄을 이어 앞사람을 따랐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낯익은 느낌에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렇다. 그녀가 입가에 갸날픈 미소를 띤 채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부석사 화장실은 부재가 널판지로 짜여 절집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이물스런 도기변기가 생경했다. 칸마다 머리위에 방충망이 덮였다. 대낮인데 형광등이 불을 밝혔고, 방충망 위 나방과 날벌레들의 사체가 쌓였다. 스님들의 어여쁜 마음씨가 엿보였다. 화장실을 나오자 거북머리에서 물이 나오는 돌 수조와 공중전화부스 그리고 다리품을 쉴 수 있는 벤치 대여섯 개가 나무그늘아래 자리 잡았다. 나는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전화부스에 들어섰다. 유리창 너머로 물방울무늬 그녀가 보였다. 나의 배낭이 내려진 벤치 한구석에 앉아 그녀는 무연히 천왕문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용건만 말하고 전화부스를 나왔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거기에. 나는 황급히 돌계단을 뛰어 올랐다. 선묘각. 안양루. 낯익은 미소를 머금은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뛰다시피 경내 요사채를 두리번거렸다. 내가 왜 이럴까! 나는 힘없는 걸음으로 천왕문을 지나 은행나무가 도열한 경사로를 내려와 일주문 앞에 섰다. 알지 못할 아쉬움이 가슴가득 밀려왔다. 바깥세상은 여전했다.
냇돌이 깔린 진입로와 사과밭. 시커멓게 그을린 산골아낙들이 사과를 사라고 사람을 불렀다.
계곡에 걸친 작은 다리 건너 매점이 있었다. 마당에 책 진열대를 내 놓았다. ‘고작해야 스포츠신문이나 통속잡지를 진열해 놓았겠지.’ 무심히 발길을 스치는데, 소책자 '부석사'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그때 주차장에서 발차를 알리는 금속성 경적소리가 중천의 햇살을 흩트렸다. 그랬다. 물방울무늬 그녀가 홀로 버스의 중간좌석 손잡이를 붙잡고 나를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역광으로 사물이 흐릿했지만 분명 그녀였다. 책이 스르르 내 손아귀를 벗어났다. 흐릿한 망막속으로 버스가 멀어져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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