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그때 그시절, 편지를 열다.

대빈창 2014. 4. 14. 07:13

 

 

 

 

○ ○ 에게

(······)

공장에서 늦으시는 어머니 대신 저녁을 하려 밥통을 들고 부엌으로 내려서자 어머니가 웃으며 들어오신다. 괜한 폼만 잡은 꼴이다. 방으로 들어와 곧장 펜을 든다. 다행이다. 첫 가족면회를 했다니. 너그러운 마음이 부럽구나. 가족들의 마음고생이야 오죽 하겠니. 뒷바라지로 후배들과 후원회를 만들었다. 4 ~ 5명 선. 온라인을 개설하고. 내 생각으로 한복도 필요할 것이고. 구치소 앞 한복집 기성복은 벌 당 2만5천원 생각보다 비싸지 않더구나. 속옷과 양말 2 ~ 3켤레도, 답장에 필요한 책명과 출판사(정확한)를 꼭 적어 보내주길 바란다.

부담스러움은 갖지 말기를. 이것은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부담 없이 서로 서신연락이라도 하는 것이 아니냐. 매주 수요일 정기적으로 면회 갈게. 노동자의 든든한 몸을 만드는 계기로 삼길. ‘변증법적 몸만들기’인가?

(······)                                                                                                                                       92. 9. 23  김포에서

 

2년 전 덕유산 자락 외딴집의 후배에게 92년 9월부터 93년 1월까지 20년이 넘은 편지 5통을 돌려받았습니다. '검열필' 잉크가 선명한 그때 그 시절 편지를 다시 펼칩니다. 90년 겨울. 저는 안산 공단, 후배는 청주 공단의 한 공장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습니다. 2년여 세월 동안 우리는 한번 얼굴을 마주 대했습니다. 92년 총선과 대선으로 바빴던 나는 일이 터지고 한참후에야 후배가 안기부에 강제연행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후배의 소재지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다행히 후배에 대한 정보를 동대문의 빨간 벽돌집 민가협에서 접할 수 있었습니다. 부리나케 서울구치소로 향했지만 검취과정으로 면회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 후 초췌한 얼굴의 후배을 통해, 또 다른 후배가 영등포 구치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후배들은 사노맹원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현장을 물색하며 개봉동 연립 지하방에서 노가다를 하다 막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그때 그 시절.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저는 후배들의 옥바라지에 매달렸습니다. 영등포 구치소는 개봉역 후문에 있어 교통이 편리했습니다. 의왕시 포일동의 서울 구치소는 오고 가는데 하루가 온전히 걸렸습니다. 김포에서 시외버스로 영등포를, 영등포에서 사당역까지 전철로, 사당역에서 인덕원을 경유하는 시내버스를 갈아타고 후배를 접견했습니다. 일주일 한번 면회였지만, 영치금과 책을 마련하는 시간이 저에게 무척 벅찬 세월이었습니다. 아! 후배의 수번은 109번이었습니다. 적개심 가득한, 닫힌 사회를 향한 저의 분노가 이 편지들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편지를 다시 접어 장롱에 곱게 쟁입니다. 내년 봄. 저의 발길은 덕유산자락 외딴집으로 향할 것입니다.

 

p.s 저는 감옥생활을 하는 후배들에게  정성이 담긴 편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B5 용지를 재단하여 겉봉을 만들고, 만년필로 B5 용지에 쓴 편지를 동봉하여 우체국에 가 100원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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