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에게 한마디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음나무와 머루가 오래전에 터 잡은 바위벼랑에서 대빈창 해변의 제방 길은 끝납니다. 물이 밀면 벼랑 발잔등에 흰거품이 일렁이고, 물이 썰면 벼랑에서 이어진 돌너덜이 갯벌로 이어집니다. 아침저녁 저의 산책길의 반환점이기도 합니다. 낮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해송 숲이 해안을 띠처럼 감쌌습니다. 솔숲에서 벼랑까지 0.5㎞ 제방이 이어집니다. 해안에 바투 다가 선 산줄기가 제방을 따라가며 고도를 높입니다. 벼랑으로 다가갈수록 마루금이 칼날처럼 날카롭습니다. 잡목이 숲을 이룬 직각에 가까운 산비탈에 고라니가 다닌 길만 선명합니다. 토끼가 터 잡은 곳은 삼태기 형국입니다. 이곳에 닿으려면 제방을 타는 외길 밖에 없습니다. 바다에서 밀려 온 골안개가 산자락을 기어오르는 아침 산책에서 저는 생뚱맞게 토끼를 만났습니다.
녀석은 배트맨의 로빈처럼 눈 주위만 새까맣습니다. 온몸이 하얀 털로 뒤덮였고, 검은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말입니다. 벌써 일주일이 넘었습니다. 아침저녁 산책에 나서면 녀석의 안부가 궁금해집니다. 뭍에 나갔다가 이틀 뒤에 돌아 왔는데 녀석은 놀이터에서 무신경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아침저녁으로 눈에 뜨이질 않아 저의 애를 태우기도 했습니다. 혹시 족제비나 솔개가 채가지나 않았을까. 아니면 풀어 논 마을 개들이 여기까지 침범한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면 사람 눈에 뜨인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날 이른 아침 안개 자욱한 벼랑 앞에서 녀석이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토끼는 어디서 왔을까요. 분명 ‘욕심쟁이 할아버지’ 농장에서 가출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솔숲과 산자락이 이어지는 구릉에 농장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말씀 하셨습니다.
“발붐 발붐 오났다가 집을 못 찾아가나보다.”
녀석은 얄밉게도 번번이 저의 손을 벗어나 도망을 칩니다. 맨손으로 도저히 잡을 수가 없습니다. 녀석은 요즘 부쩍 마을 사람들 눈에 뜨일 수밖에 없습니다. 상합을 캐는 마을 사람들이 펄이 물러지면서 벼랑 쪽 방조제에서 펄에 들고 납니다. 어느 날 여명이 터오는 시각. 벼랑 앞 공터에 경운기가 서 있습니다. 상합을 캐서 펄을 걸어 나오는 아내를 마중 나온 한 아저씨가 말씀 하십니다.
“이 토끼 누가 여기 갔다 놓았나 봐.”
사람들이 눈에 뜨이자 놀란 토끼가 방조제 돌 틈에 몸을 숨겼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저의 손길이 닿을 거리에서 쭈볏쭈볏 몸만 요리조리 뺄 정도였습니다.오늘 아침 멀리 제방 끝에 흰 물체가 움직입니다. 분명 녀석입니다. 제가 다가서자 잽싸게 녀석이 제방밑 돌틈으로 들어 갔습니다. 며칠 동안 많은 사람들을 본 녀석은 분명 두려움과 공포를 본능적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녀석은 시간이 갈수록 야생에 적응할 것입니다. 더욱 녀석을 붙잡기가 힘들어 질 것입니다. 저는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기로 작정했습니다. 추위가 닥치고 녀석이 먹을 것이 궁해질 무렵 그때 다시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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