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빠꾸와 오라이
지은이 : 황대권
펴낸곳 : 도솔오두막
붕괴된 바벨탑이 다시 세워지고 있다. 창세기 바벨탑의 붕괴는 하느님이 직접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간들의 야망을 날려버린 것이다. 여기서 바벨은 '혼잡'이라는 뜻이다. 즉 언어의 혼잡을 유도한 것이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역으로 '언어의 다양성'이라는 축복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진행되는 바벱탑의 축조는 인간 스스로 다양한 언어를 파괴하는 것을 이른다.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에 의하면 2주일에 1개꼴로 지구상에서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생물다양성이 존재하는 지역에 언어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에 있다. 사멸위기 언어분포도를 들여다보니 인간의 개발 광풍이 미치지 못한 곳일수록 언어의 다양성이 살아있다. 일례로 파푸아뉴기니는 세계 육지 면적의 1% 이지만,무려 1,000개의 언어를 가져 전 세계 언어의 13.2%를 차지한다. 세계 깡패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체제라는 세계화는 다름아닌, 생물다양성과 언어다양성의 사멸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의 총량이 줄어듦'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한글은? 한국어의 사용자는 7,500만명으로 세계에서 12번째로 막대그래프가 길다. 현재 우리말은 망신창이에 가깝다.
그것은 근대화 과정의 왜곡으로부터 비롯된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어가 국어였으며,서양어는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받아 들였다. 다시말해 서양어는 일본식 번역을 통해 접수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방 후의 사정이 낳아진 것은 아니다. 다만 외래어의 종주국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는 현재진행형이다. '빠꾸와 오라이'에서 황대권은 아마추어 국어학자의 모습으로 우리앞에 등장했다. '황대권의 우리말 속 일본말 여행'이라는 부제가 말해주 듯 일본 책을 읽다가 '맘마'라는 단어를 만난 것이 우리말 속의 일본 말을 추려내는 계기가 되었다. 1평 독방에 갇힌 수감자로서 저자의 작업은 무식(?)한 방법을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1만쪽이 넘는 일본어 사전을 4개월동안 깡그리 뒤적이는 것이다. 저자가 우리말로 알았던(대부분의 사람들도 여기서 예외일 수는 없다. 국어학자를 제외하고는) 일상 속의 일본말 240여개를 추려내서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조근조근 독자에게 들려준다.
'되새김글'에서는 나의 추억이 얽힌 서너개의 단어를 추려내 소개한다. 철없던 국민학교 시절. 50분 수업을 하고 10분 쉬는 시간에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면 어김없이 그 친구가 양지바른 곳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소아마비 지체장애인이었던 친구는 옆동네에 살았다. 더군다나 정신지체까지 겹쳐 수업을 받을 수 없었지만, 등교길에 동갑내기들을 따라와 학교가 파하면 같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친구는 우리 얼굴만 보이면 '미루꾸'를 달라고 손을 내밀어 자연스레 그 친구의 별명이 되었다. 여기서 '미루꾸'는 milk caramel에서 앞 음절만 따온 일본식 발음이다. 웃기지 않는가. 즉 우유가 캐러멜을 대신한 것이다. 요즘 세대를 위하여 덧붙인다. 과자 중 우리는 흔히 슈퍼에 가 '크라운 산도'를 달라고 한다. 여기서 '산도'는 '샌드위치'의 일본식 줄임말이다. 육체미 선수들의 울퉁불퉁한 가슴 근육을 보며, 우리는 흔히 '야! 저 갑빠 좀 봐!'라고 한다. 이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다. 지은이가 어렵게 찾은 어원을 보면, 포루투칼어 capa는 '소매 없는 비옷'을 뜻하는데, 일본인은 비막이로 쓰는 '기름종이'로 의미를 차용하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에서는 기름종이의 딱딱함이 근육의 딱딱함으로 의미 전환되었던 것이다.
내 기억의 최초 지점은 '가마니'와 연관된다. 내가 5 ~ 6살쯤 무렵이었을 것이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우리 집에서 가마니를 짰다. 가마니 틀 가운데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아버지는 양 옆의 아주머니들이 긴 대바늘로 짚을 한 가닥씩 번갈아 가며 새끼줄 사이로 찔러 넣으면 큰 바디로 내리쳤다. 나는 여적 가마니를 순 우리말로 알았다. 하지만 일본말 '가마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온돌방에서 남자들끼리 술자리를 하면 시간이 갈수록 알코올 기운이 올라와 윗옷을 벗게 된다. 그럼 자연스레 '난닝구' 바람으로 술자리는 무르익는다. 그럼 나는 술이 취한 척 상대방을 가리키며 가장된 면박을 준다. '야! 난닝구 좀 빨아 입어라!' 그럼 술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하며 '원래 난닝구 색깔이 이래, 술 취했나봐!' 한다. 이 말에도 '미루꾸'처럼 일본인들의 생략 버릇이 묻어있다. 원래는 running shirt로 '뜀박질할 때 입는 옷'인데 '달린다'는 running이 옷 이름이 된 것이다. 해도해도 끝이 없을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 지금까지 써 내려온 글 중에서도 내가 알지 못하는 일본말이 들어있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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