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봄 / 심야 / 황해도 해주의 바다 /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 울음을 터뜨린 한 嬰兒를 삼킨 곳. / 스물 몇 해를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故 김종삼의 ‘민간인’이다. 어렵게 배가 떴다. 풍랑·강풍주의보 발효로 배는 주문도 앞바다에 이틀간 발이 묶였다. 13일 목요일 오후 3시에서 4시를 가고 있다. 외포리 포구에서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안. 어머니가 말을 붙였다. “사람이 없다는 구나. 고모부가 피난민이라 외톨이어서 그렇구나.” 그때 나는 시를 떠올렸다. “옥상에서 어제 떨어졌다는구나.” 나는 아득해졌다. “그럼 자살하셨어요.” 누이는 어제 막내고모부의 부음을 알리면서 사실을 애써 내게 숨겼다. 장례식장은 썰렁했다. 아버지, 숙부가 이 장례식장에서 떠나셨다. 3남3녀 아버지 형제 중 세 번째로 막내 고모의 남편이 돌아가셨다. 내가 초중고교를 다니던 읍내 끝머리의 외떨어진 건물. 병원을 끼지 않아 그렇잖아도 한적한 식장의 나머지 3개실은 텅 비었다. 막내고모의 형제들과 조카들만이 띄엄띄엄 눈에 뜨일 뿐이다.
몇 년 째 고모부는 지병으로 고생하셨다. 눈은 멀었고, 허리와 무릎이 고장 나 걷지도 못했다. 시골 면소재지의 낡은 빌라에서 두 분이 아픈 몸을 추스르며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계셨다. 내가 먼저 섬에 어머니를 모셨고, 두 분은 뒤이어 낡은 빌라로 이사를 하셨다. 그전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 어머니와 고모는 내가 태어난 시골 ‘한들고개’에서 함께 사셨다. 막내고모는 48번국도가 지나치는 도로변에 구멍가게 ‘칠성상회’를 꾸렸다. 미친 한강신도시 개발바람이 들이닥쳤다. 소규모 공장들과 주유소, 식당가, 치킨, 편의점, 복덕방이 도로 양안에 들어찼다. 시골이 도시로 분칠하는 시간은 의의로 짧았다. 토배기들은 새로 입주한 ‘신일 해피트리’ APT로 쫓겨났다. 우리 집이 섬으로 들어오고, 혈육과 떨어진 고모는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는지 예의 낡은 빌라로 이사했다.
막내고모와 고모부는 동갑으로 40살을 넘길 즈음 재혼했다. 나는 고모부의 상처에 대해 모른다. 자식은 큰딸, 외아들, 막내딸 1남2녀 였다. 고모부는 자식복도 없었다. 막내딸이 백혈병으로 고생하자 성심으로 남묘호렌게교를 믿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내딸은 중학을 마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큰딸은 결혼하고 자식 셋을 두었지만 무슨 일인지 집안과 인연을 끊었다. 상주는 외아들 부부뿐이었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게임에 빠져 무위도식하는 폐인생활을 몇년간 지속해 고모부의 속을 썩였다. 다행히 정신을 차려 직장도 잡고 결혼했다. 막내고모는 그때 혼자였다. 아들 둘을 두고 남편은 술에 취해 한강을 도강하다 익사했다. 돌이 갓 지난 둘째를 입양시키고, 큰애는 강화 이모할머니한테 맡겼다. 젊은 막내고모는 자유로운 것이었는지 아니면 문란한 것이었는지 혼자 살다 고모부를 만났다. 우리 집에 들렀다가 혼담이 오고갔을 것이다. 큰아들은 결혼을 앞두고 동두천 이모네 집에 인사를 드리러갔다가 그만 한탄강에서 물놀이하다 익사했다. 상주의 사람 착한 것은 내력이었다. 막내고모부는 사람이 너무 순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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