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고모부는 향년 72세였다. 내 기억으로 30대 후반에 내가 살던 고향 ‘한들고개’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흘러 들어왔다. 고교를 졸업한 후 세상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알코올에 기댄 주먹질로 나날을 보내던 나를 고모부는 측은하게 보았다. 일거리가 생기면 나를 데모도로 꼭 데리고 다녔다. 목수, 미장이, 보일러 수리, 상·하수도 공사 등 고모부의 눈썰미와 손재주는 만능이었다. 하지만 농사일은 의외로 젬병이셨다. 밤 9시가 넘어서 고모부가 사시던 ‘한들고개’ 어른들 10여명이 문상을 왔다. 동네 분들이 미얀마로 관광을 가셨다가 오늘 돌아오셨다. 아주 오래 전 그들의 집은 고모부의 잔손길이 구석구석 미쳤을 것이다. 그 인연이 겨울로 가는 길목의 쌀쌀한 늦은 밤이지만 발길을 옮기게 했을 것이다. 자정이 넘었다. 그나마 적막하던 장례식장은 어둠의 고요가 무거운 장막을 내려뜨렸다.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초로의 중년남자가 주정을 부렸다. 대꾸하는 사람도 없자 그는 텅 빈 눈길로 영정을 올려다보다 이내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누이는 섬에 들어 올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막내고모집에 들렀다. 그것이 시누이와 올케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고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막내고모는 두 번 섬에 오셨다.
11월 14일(윤 9월) 금요일 새벽 5시. 밤새 첫눈이 내렸다. 주차장의 차마다 제법 굵은 눈송이가 차체를 덮었다. 막내고모부의 발인 날. 외가 조카들이 운구를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상객이 없었다. 나와 어머니는 차로 영구차를 따라갔다. 배 시간에 쫓겼기 때문이다. 부평 승화원가는 길. 서울외곽고속도로는 언제나처럼 정체가 심했다. 막내고모부의 관이 화로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어머니와 나는 길을 나섰다. “오빠, 가다가 엄마와 점심 먹고 들어가.” “뭘 먹어야 되냐.” “도가니탕이 좋을 것 같은 데.” 어머니는 골다공증으로 걸음이 불편하셨다. 막내고모와 어머니가 함께 살던 동네 ‘한들고개’. 한길을 향한 유리창이 항상 열려있던 막내고모의 구멍가게 ‘칠성상회’의 맞은 편 도로건너 음식점이 눈에 들어왔다. ‘양촌설렁탕집’ 여기서 陽村은 한들고개와 벌판을 두고 마주한 건너 마을이었다. ‘햇살 좋은 마을’을 상호로 삼은 것인가. 아무튼 어머니는 도가니탕을 달게 드셨다. 오후 3시40분발 외포리 출발 주문도 행 삼보12호 객선. 섬에 닿자마자 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납골당 ‘무지개 뜨는 언덕’에 막내고모부를 모셨다고. 납골당은 ‘양촌’에 있었다. 이틀 전 막내고모부는 보이지 않는 눈과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끌고 빌라 옥상을 오르셨다. 어머니는 심신이 부대꼈으리라. 잠결에 어머니는 악몽에 시달리며 고함을 질러댔다. 나는 어슴푸레한 어둠을 건너 건너방의 누워 계신 어머니를 흔들었다. "어머니, 나쁜 꿈 꾸셨나봐." "에고, 또 니 잠을 깨웠구나." 어머니는 잠기가 묻은 소리로 미안해하셨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 함께 지났다고, /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 서로 적막하다고,
뭍에 건너가 이틀간 막내고모부의 초상을 치르고 섬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애닯고 쓸쓸해 하셨다. 마루에 우두커니 앉아 바다건너 고향섬 석모도에 무연히 눈길을 주는 어머니를 지켜보다 나는 故 김종삼의 시집을 펼쳐 '묵화'를 찾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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