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나무와 머루가 터 잡은 바위벼랑이 대빈창 해변의 제방 끝입니다. 물이 밀면 벼랑 발잔등에 흰 거품이 일렁이고, 물이 쓸면 벼랑에서 이어진 돌너덜이 갯벌로 이어집니다. 아침저녁 산책의 반환점입니다. 낮은 산자락의 해송 숲이 해안을 띠처럼 감쌌습니다. 솔숲에서 벼랑까지 0.5㎞ 제방이 이어집니다. 해안에 바투 다가 선 산줄기가 제방을 따라가며 고도를 높입니다. 벼랑으로 다가갈수록 마루금이 칼날처럼 날카롭습니다. 잡목이 숲을 이룬 직각에 가까운 산비탈에 고라니가 다닌 길이 선명합니다. 토끼가 터 잡은 이곳은 삼태기 형국입니다. 이곳에 오려면 제방을 타는 외길 밖에 없습니다. 바다에서 밀려 온 골안개가 산자락을 기어오르는 이른 아침에 저는 생뚱맞게 토끼를 만났습니다. 작년 4월 17일에 올린 ‘발붐 발붐 집 나온 토끼’의 시작 글입니다.
한마디로 이곳은 토진이의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신록이 엽록소를 잃고 찬 바람에 우중충한 옷을 두껍게 껴입은 계절. 토진이가 터 잡은 곳은 해가 중천을 넘어서면서 햇살이 비춥니다. 바닷가에 바투 붙은 경사진 산자락의 눈은 햇빛의 온기에 자취를 감춥니다. 서향의 해변을 감싼 산자락은 자연스럽게 북동풍을 막아 줍니다. 토진이는 집토끼라 낯이 익어 사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손이 닿질 않는 거리에서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끝없이 입을 오물거립니다. 산토끼라면 인기척만 느껴도 줄행랑을 놓았을 것입니다. 산중턱의 쓰러진 고목에 이르는 경사는 어린 아까시 나무가 빼곡하여 접근하기가 용이치 않습니다. 토진이의 본능적 자기방어입니다. 생을 다하고 넘어진 고목등걸에서 토진이가 마른 풀을 오물거립니다. 토끼의 행동반경이 넓어졌습니다. 먹을거리가 풍부했던 늦가을까지 바위벼랑 부근에서 얼쩡거리던 토진이가 제방 진입로로 100m 가까이 이동하였습니다.
우리 산하의 야생토끼를 멧토끼라고 합니다. 덩치가 크고 털은 회색을 띱니다. 500m 이하의 야산에 서식하는데 번식률이 낮아 년 중 두세 번에 걸쳐 2 ~ 4마리의 새끼를 낳습니다. 토끼를 가축으로 키운 것은 기원전 3,000년 전으로 유럽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처음 길들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집토끼는 1900년대 일본에서 수입하여 모피용과 육용으로 사육하였습니다. 토진이의 야생 적응성이 뛰어나고 특별하여 더욱 귀엽습니다. 다리가 불편하신 할머니가 토끼풀 뜯기가 힘겨워 초봄 토진이를 풀어놓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서 토진이가 걱정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을 어떻게 이겨낼까 걱정하는 내게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토끼는 굴을 깊게 파고 들어가니깐 괜찮을거야.”
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토진이는 지금 역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구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먼저 상륙을 시도한 물고기가 실러캔스입니다. 먼 옛날 유럽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축화된 토끼가 서해의 작은 외딴섬 대빈창 해변에서 다시 야생으로 돌아가는 역진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배트맨의 로빈처럼, 선글라스를 쓴 것처럼 눈 주변만 시커먼 흰토끼 토진이가 고난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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