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시인의 서랍
지은이 : 이정록
펴낸곳 : 한겨레출판
시인 이정록의 등단 20년 만에 펴낸 첫 산문집의 표사에 ‘사람 사는 냄새가 진동하는 글’이라고 시인 함민복은 말했다. 이 말은 1부 「밥상머리」와 2부 「좁쌀일기」 모두 39꼭지에 실린 글들을 이른다. 아들의 교련복을 마련하려 텃밭 움의 배추·무를 시장에 팔러가는 어머니. 낮술에 취하셔 문지방을 베고 낮잠에 빠진 아버지. 상한 피라미를 구워먹고 배탈이 난 손자의 배앓이를 약손으로 쓰다듬어주시고, 품앗이 삯으로 손주들 먹이려 예쁜 과일을 가져 오신 할머니.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고교진학을 포기한 누나. 결혼반지를 판 남편을 이해하는 속 넓은 아내. 먼지 뽀얀 신작로를 걸어서 가난한 아이들의 가정을 방문한 여선생님. 도둑 독서를 하는 어린 시인에게 책을 깨끗이 읽는 방법을 일러주는 서점 누나. 주점을 차려 생계를 잇는 가난한 대학생 친구. 어두운 운동장에서 불편한 다리로 구령을 연습하는 총학생회장. 어린 자식들을 피해 교통 위반한 아빠의 체면을 세워 준 교통경찰 등.
3부 「시 줍는 사람」의 16꼭지는 문단에 막 들어 선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시인이 스스로 깨우 친 시작詩作에 관한 글들이다. 시인이 내세우는 시론은 ‘문지방 시학’이다. ‘좋은 시는 자신의 울타리 문지방 너머에 있지 않습니다. 문지방에 켜켜이 쌓인 식구들의 손때와 그 손때에 가려진 나이테며 옹이를 읽지 못하다면 어찌 문밖 사람들의 애환과 세상의 한숨을 그려낼 수 있겠는지요.’(209쪽) 이 구절 하나만으로 책값을 다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두 55꼭지의 글 중에서 나의 눈길이 가장 오래 머무른 글은 ‘훠어이 훠어이’(53 ~ 55쪽) 이었다. 할머니는 샘가 도랑의 작은 생명들이 다칠까봐 뜨건 물을 버리기 전에 위험을 알리려 양팔을 휘저으며 헛손질 하셨다. 동네 어르신은 보리밭에 깃든 들쥐, 두꺼비, 개구리, 뱀, 새 등 각종 산 것들에게 내일 보리 베기를 한다고 작대기로 지게를 두드리며 소리쳤다. 밤사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라는 안내방송이었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생태와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슴속에 새겨야 할 마음 씀씀이일 것이다.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시인의 문학적 태반이 어머니라는 사실은 근간된 시집으로 알 수 있다. ‘어머니 학교’다. 어머니의 일상과 말씀에서 얻은 영감이 빚어 낸 시편들을 모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지은 시편을 모은 ‘아버지 학교’가 나의 책장에 어깨를 겯고 있다. 시인의 서랍에는 어떤 비밀스런 물건들이 감추어져 있을까. ‘시를 쓰려면 자신이 쓰려는 시상이나 글감을 오래도록 굴리며 품고 살아야 하겠죠. 그가 나를 버리지 않는 한 내가 먼저 떠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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