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끌림

대빈창 2008. 4. 6. 19:20

 

책이름 : 끌림

지은이 : 이병률

펴낸곳 : 랜덤하우스코리아

 

'끌림'의 책 판형은 B 46배판으로 만화책 크기다. 우체국 택배로 배달된 골판지 박스를 열자 앙증맞은 크기의 책이 맨 위에 얹혀져 눈길을 끌었다. 점퍼 호주머니에 들어갈 크기다. 새하얀 겉표지는 점자가 새겨진 듯 오돌도돌하다. 한 꺼풀을 벗기자 초콜릿 케이크의 생일축하 메시지를 장식한 듯한 속표지가 나타난다. 다지인에 정성을 깃들인 흔적이 여실하다. 위 책 이미지에서 하얀 벽에 박힌 검은 타일같은 네모안의 문구는 '1994 ~ 2005'와 'TRAVEL NOTES"로 지은이가 10여년 동안 50개국, 200여  도시에 머문 발길을 뜻한다. 제호 '끌림'이 조금 큰 고딕체로 박혀있고, 타일 위 그림은 자전거를 탄 여행자의 모습이다. 저자는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와 '바람의 사생활' 두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 제목에서 알수있듯 시집은 역마살에 몸을 맡긴 시인의 사색이 빚어낸 결실일 것이다. 이 책의 편집체계는 독특하다. 독자의 편의를 위해 여느 책들이 갖춘 목차와 쪽수가 없다. 다만 #001 '열정' 챕터가 프롤로그에 해당하고, # 070까지가 굳이 나눈다면 본문이다. #071은 카메라 노트로 지은이가 직접 찍은 사진 113컷에 대한 단상이다. 그리고 맨 뒤 #000 '도망가야지, 도망가야지'는 에필로그로 '저자의 말'에 해당된다. 그러기에 독자는 여는 책처럼 앞에서 순서대로 읽어나가지 않아도 된다. #071 카메라 노트를 펼쳐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글귀에 눈에 닿으면 그 장을 펼치면 된다.

책 뒷표지에는 3개의 표사가 실렸는데, 그중 시인 최호승의 '여행자의 가슴속에 눈물처럼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순간의 순간만을 담은 책'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은다.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여행기나 답사기가 아닌, 지은이의 내면 풍경기록으로 볼 수 있다. 책을 펼쳐들면 저자의 쓸쓸한 내면이 들여다 보이는 것 같다.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유일한 해외여행이었던 5년 전 태국에서 만난, 몸이 불편한 가이드 '뿌'와의 인연을 떠 올린다. '뿌'의 성의있고 열성적인 관광안내를 받으며, 나는 속으로 울었다. 지리학을 전공하면 취업전선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가이드를 꿈꾸었을 것이다. 감성적인 한국어의 구사에 능란했지만, 그녀의 외모는 태국의 가난한 민중의 딸을 떠 올리기에 어렵지 않았다. 작달막한 체구에 태국에서는 오히려 보기힘든 뚱뚱한 몸피, 더군다나 검은 피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한낮의 찌는듯한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터운 장갑을 오른손에 꼈고, 한 발도 심하게 땅바닥을 끄는 절름발이였다. 그 절망적이고 참혹한 몸뚱이에서 신명나고 쾌활한 목소리의 그녀를 보는 것은 차라리 괴로움이었다. 불교 신도로서 현세에 연연하지 않는 온순한 심성의 착한 아가씨였다. 그녀와 일행은 새벽사원 앞 버스정류장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그녀의 오늘 가이드 보수는 50불이었다. 그 돈으로 그녀는 며칠간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가리라. 나는 일행 중 마지막으로 버스계단에 발을 올려 놓으며 그녀 손에 만원을 집어 주었다. 버스가 움직이면서 차창 밖으로 보드블록의 까무잡잡한 그녀가 유난히 흰 치아를 활짝 드러냈다. 지금도 그녀의 해맑은 웃음은 나의 뇌리에 물기어린 파문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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