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국화꽃의 비밀

대빈창 2008. 3. 27. 09:58

 

 

책이름 : 국화꽃의 비밀

지은이 : 김환희

펴낸곳 : 새움

 

새 천년의 첫해. 신문 지상은 온통 두 거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곡성으로 가득찼다. '소설하면 황순원, 시에는 서정주'라 불릴만큼 한국문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지대한 두 거인이 동시에 쓰러졌다. 황순원과 서정주는 1915년 같은 해에 태어나, 2000년에 나란히 타계했다. 시장 지배사회의 독점적 제왕으로 군림하는 한 재벌이 운영하는 신문사는 서둘러 미당문학상을 제정했다. 정부는 미당이 죽은 지 반년 만에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이땅의 민주화를 앞당기다 의문사한 장준하는 은관문화훈장이었다) 이때 국화꽃의 비밀은 '단군이래 최대의 시인', '시인부락의 족장'이라는 이땅의 예술인으로 가장 거창한 추앙을 받는 미당의 업적에 의문을 제기하며 비밀을 파헤쳤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국민적 애송시 1호'로 불리는 菊花옆에서전문이다. 시는 한국의 성인남녀들이 한 구절쯤은 자연스럽게 입에 매달고 있다. 세계 제일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부모의 극성에 국정교과서에 실린, 더 큰 이유는 대입에 출제될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암기(?)했을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모든 풍상을 겪고 인품이 완성된 경지에 이른 40대 누님'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국화꽃으로 배웠다. 그런데 '노오란 꽃잎'이 일본 왕실의 문장(紋章) 황국(黃菊)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면 국화 옆에서는 철저한 친일시가 되었다. 미당은 자신의 친일적 삶을 종천순일(從天順日)이라는 허구적 논리로 포장했다. 아니 그의 삶은 오히려 친일부역적 삶이라고 표현해야 옳았다. 하늘과 태양의 뜻을 섬김으로 살아온 미당의 족적을 살펴보자. 가미가제 특공대를 찬양한 미당의 대표적 친일시 마쓰이 히데오 송가의 9연과 1987년에 발표된 전두환 탄신 56회 축시의 8연이다.

 

수백 척 비행기와 / 대포와 / 폭팔탄과 /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 그대 / 몸뚱이로 내려져서 깨었는가? /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육천동포의 지지를 얻으셨나니

 

하늘과 태양은 일제강점기에는 히로히토왕과 천조대신이었고, 해방후에는 이승만(미당이 자서전을 집필했다)이나 전두환같은 독재자였다. 미당은 시대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신하며 종이 주인을 섬기듯 종천순일했다. 그는 자신의 추악한 삶을 '하늘'의 뜻을 따른 것으로 합리화했다. 종천순일은 미당의 삶 전반을 관통한 그의 지저분(?)한 세계관일 뿐이었다.

신예 문학평론가는 『국화꽃의 비밀』을 미당 사후, 일반 문예지에 투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당 특집으로 도배질되는 한국 문학계의 패거리 정신에 학을 띠고 '창비무명인'이라는 아이디로 창비 자유게시판에 분재할 수밖에 없었다. 문단을 쥐고 흔드는 미당 똘마니들의 무책임한 언어적 망나니 칼질이 훤히 보였다. 조폭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패거리 의식이 강한 이 땅의 문학 풍토에서 지은이는 당장 '왕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막강한 소수의 문학권력을 쥔 자가 좌지우지하는 문단에서 그들의 스승인 미당의 허물을 밝히는 것은 문학적 자살에 다름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엔 친일시를,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일평생을 문학적 복무(?)에 충실했던 시인이 국민적 추앙을 받는 나라가 지구상에 존재할까. 소위 문학을 사랑한다는 이들의 문인·문학 신비주의에 빠진 순진(?)이 가여웠다. 저자는 이런 문단 풍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렵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지만 자신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관행으로 책 날개에 저자의 이력을 표기하지만, 본명만 어렵게 밝혔다. 그리고 이렇게 핑계(?)를 대었다. "학연과 지연이 형성한 그물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한 문학도의 소박한 소망으로 받아들여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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