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산정묘지

대빈창 2015. 4. 15. 03:27

               

 

       

책이름 : 산정묘지

지은이 : 조정권

펴낸곳 : 민음사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시인 유용주의 어느 글에서 잠깐 얼굴을 내민 시집을 다시 만났다. 「산정묘지」. 시집을 손에 넣기가 만만치 않았다. 인터넷 서적마다 품절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나는 산정묘지 연작이 온전히 실린 시집을 찾았다. 중고샵을 통해 어렵게 시집을 손에 넣었다. 시집은 1부 山頂墓地 연작 30편, 2부 短行詩篇 18편, 그리고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해설 ‘견인주의적 상상력의 시’로 구성되었다. 20여 년 전 나는 시인을 시집이 아닌 산문집을 통해 처음 만났다. 문학동네산문집 4 「하늘에 닿는 손길」은 예술기행산문집으로 시인이 만난 미술가들에 대한 기록이다. 시인은 그 시절 음악은 물론 미술평론까지 넘나들었다. 이 산문집은 1994년에 세상의 빛을 보았다. 시인은 1977년부터 1983년까지 예술종합지 <공간>의 편집장과 주간을 역임했다. 이제 「산정묘지」 연작의 견인주의(堅忍主義) - 욕정이나 욕망 따위를 의지의 힘으로 굳게 참고 견디어 억제해야 한다는 도덕적 또는 종교적 생각이나 태도의 맹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겠다. 시인은 말했다. <공간>이 금기로 여긴 것이 예술가의 비인간적 속물근성, 짐승스러움으로 변해가는 이기주의, 현세적인 합리주의였다고.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 얼음처럼 빛나고, /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 가장 높은 정신은 /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 간밤의 눈이 다 녹아버린 이른 아침, / 山頂은 / 얼음을 그대로 뒤집어쓴 채 / 빛을 받들고 있다. / 만일 내 영혼이 天上의 누각을 꿈꾸어 왔다면 / 나는 신이 거주하는 저 天上의 一角을 그리워하리. /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

 

‘山頂墓地·1’(11 ~ 15쪽)의 부분이다. 시인은 겨울 산의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것은 ‘가장 높은 정신은 가장 추운 곳을 향하는 법’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풍미로 비속화 경향이 제어할 수 없이 확산되어 가는 오늘 위엄과 품위에 대한 지향은 그것 자체로서도 윤리적 덕목으로 근접해 간다고 할 수 있다. 비속성의 전파는 극복해야 할 정신적 공해의 한 국면이라고 생각되기 때문’(119쪽)이라고 평론가는 말했다. 시인은 인왕산 자락 냉천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로 지금까지 한 번도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한다. 서울 4대산인 북한산, 도봉산, 불암산, 수락산을 제 집 드나들 듯 하는 ‘산사나이’이기도 하다. 비속성을 거절하는 高士의 위엄과 기품은 오늘 타락한 이 시대에 더욱 유효하다. 마지막은 ‘山頂墓地·22’(67쪽)의 전문이다.

 

地上에 비내리고 山頂엔 눈내린다 / 눈은 어찌하여 地上까지 오기 꺼리는가 / 산봉우리에 학처럼 깃들고 싶은 / 저 뜻 숨기기 위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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