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따뜻한 사람들과의 대화

대빈창 2015. 4. 9. 07:00

 

 

책이름 : 따뜻한 사람들과의 대화

지은이 : 안재성

펴낸곳 : 푸른사상

 

“전공이 뭐죠”

“국어국문학이예요”

“그럼, 글을 좀 써 보시죠.”

“저는 글에 재능이 없어요.”

“농대를 다닌 나도 소설을 쓰는데 ·····.”

 

벌써 20년 저편의 세월입니다. 형과 저는 가리봉 오거리 고가 밑을 걷고 있었습니다. 진정추 사무실을 나와 버스정류장을 향하면서 나누던 짧은 대화였습니다. 그때 저는 다니던 문래동 마찌꼬바를 그만 둔 백수였습니다. 낮선 서울 거리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제가 형은 안쓰러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본 형은 생각보다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제가 품고 있었던 ‘노동문학의 거인’이라는 형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형을 글로 처음 만난 것은 1989년 전태일문학상 수상작인 장편소설『파업』입니다. 글을 읽고 알았습니다. 수배된 상태로 구로공단의 지하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쓴 첫 소설이라는 것을. 90년 새해벽두 저는 안산에서 새 삶을 시작합니다. 공단의 화공약품 노동자로 고잔동 지하방에 세들었습니다. 그리고 92년 초겨울. 쇠를 깍는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리봉 오거리 벌통방에 터를 잡고 문래동 마찌꼬바 견습공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제 손에 『사랑의 조건』과 『피에타의 사랑』이 들려있었습니다.

형의 첫 산문집을 잡으면서 떠오른 생각은 운명적으로 형을 일찍 만날 수 있었는데 나의 우유부단이 끝내 인연을 버렸다는 아쉬움입니다. 춘천에 있는 대학의 축산과에 들어간 이유가 아름다운 강원도에서 목장을 하며 글을 쓰겠다는 목가적 상상이었다는 대목에 슬며시 입가에 웃음이입니다. 인연이 닿았다면 저는 대학 2년 후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같은 대학에 진학하자고 호국단 대대장 친구가 저의 원서를 사왔습니다. 고교시절 짝사랑하던 지리과목 선생을 떠올리며 저는 사범대 지리학과를 택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아버지는 저의 대학진학을 반대했습니다.

형은 85년 노동운동의 불모지인 강원도 탄광촌으로 향합니다. 그때 만난 친구가 성완희 열사였습니다. 대학 1년을 다니던 85년 겨울, 휴학계를 내고 저는 강원도 도계로 향합니다. 부끄럽게도 사회현실에 눈 뜬 의식적 하방(下方)이 아닌 못 말리는 낭만적 객기였습니다. 겉멋에 찌든 젊은 혈기는 막장문턱도 못 밟고 노가다 판에서 허송세월합니다. 형은 1998년 포클레인 운전을 하며 경기도 이천에 자리를 잡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글쓰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박헌영, 이재유, 이현상, 이관술, 김삼룡, 신불산 등 남과 북에서 모두 천대받는 일제하 사회주의 항일 운동가들의 공백을 메꾸는 작업입니다. 저는 1993년 한양건설 직업훈련원에서 중장비를 배우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집니다. 동지들의 충고를 듣는 척 마지못하여 시골로 낙향했습니다.

제가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 삶터를 꾸린 지 10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일 년에 한두 번 남양주 마석모란공원의 민주열사묘역을 찾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거나, 현실이 힘들어 부대끼면 혼자 묘역을 찾아 죽은이들을 만나 마음을 추스릅니다. 이소선 어머니·전태일 열사·조영래 변호사·문익환 목사·계훈제 선생·김귀정 열사·박종철 열사 등. 새로 쓴 김근태 의장의 묘소는 성완희 열사 묘소 바로 위에 앉았습니다. 형은 21년이 흘렀지만 공식 추모식에 한 번도 참가하지 않고, 친구의 묘지에 혼자 찾아가 울고 왔습니다. 

 

“제가 드릴 것은 이것 밖에 없네요.”

“내가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

 

대학시절 손에 넣었던 짐만 되는 무거운 사전을 공장에 다니면서도 끌고 다녔습니다. 언제인가 글을 잡겠다는 미련이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형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습니다. 한강출판사에서 펴낸 꽤나 부피가 컸던 노란 박스에 노란 겉표지 양장본 『우리말사전』을 형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형의 삶은 인간 평등과 민주주의,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받쳤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형은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정묘지  (0) 2015.04.15
나무에게 배운다  (0) 2015.04.13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  (0) 2015.04.06
북극 얼굴이 녹을 때  (0) 2015.03.30
황토마당의 집  (0) 2015.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