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길에서 만난 사람들
지은이 : 하종강
펴낸곳 : 후마니타스
이 책의 부제는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다. 그 진짜 노동자 53명이 등장한다. '한겨레 21'은 사람을 볼 줄 안다. 연재 기사의 글쓴이로 하종강을 택했기 때문이다. 저자는 현재 '한울노동문제연구소'을 운영하며 1년에 300회 이상 노동교육을 진행중이다.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을 노동 상담으로 일관했다. 한 평생을 끊임없이 노동자들과 소통하고 노동 현장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일을 천명으로 여기는 삶을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만큼 저자의 인간적 진정성을 믿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자의 '노동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과 가슴을 아련하게 스치는 희망'은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었다. 나는 책 속의 '진짜 노동자'들을 거의 이름으로나마 접해본적이 없다. 그것은 저자가 인터뷰 대상자로 유명세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름으로나마 들어보거나, 작은 인연이라도 맺은 사람은 고작 네다섯명 이었다. '구미유학생간첩단사건'의 최후의 1인자 강용주,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아오신 이소선 여사, 어머님의 구속에 투신했던 전태일기념사업회의 민종덕,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어받아 이 땅에서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진정한 인간해방을 앞당기는 수많은 현장 활동가들, 유일한 서울시의회 여성의원이었던 민주노동당 심재옥, 자식을 잃은 슬픔을 환경운동으로 승화시킨 풀꽃세상의 정상명 등.
바로 이들이 이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 위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그 길 위에서 내려 선지가 오래되었다. 책을 읽어 나가는 내내 나는 가슴이 먹먹해져 갔다. 싸하게 밀려오는 회한의 기억 속으로 앳된 두명의 얼굴이 더올랐다. 금영과 영배, 90년 벽두 겨울, 나는 안산공단의 ○○약품 공장노동자였다. 고잔동의 월세 지하방과 안산 공단의 B블록에 위치한 공장에서 나는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화공약품에 찌든 공장 울타리의 나무들이 저마다 만발한 꽃을 자랑했던가.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3층 높이의 탱크에 암모니아액을 쏟아붓고 있었다. 해골을 X자로 감싼 뼈다귀가 우습다는 듯이 매캐한 기체가 뿜어내는 독성에 온 몸을 드러낸 채 담배를 꼬나물고 있었으리라. "형님 ! 큰일 났어요. 금영이가" 앳된 얼굴의 영배가 헐레벌떡 숨이 목에 차 말끝을 잇지 못했다. 금영이와 영배는 ○○공고 3학년으로 봄에 공장에 실습을 나왔다. 사고는 이랬다. 두통약의 원료인 염산원액을 고압호스로 3층 높이의 탱크에 끌어 올리던 금영이가 화상을 입은 것이다. 압력을 이기지 못한 호스가 터져 쇠도 녹아버리는 염산이 금영에게 튀었다. 다행히 동작이 잽싼 금영 이라 허벅지에 튄 염산은 작업복을 걸레로 만들고 가벼운 화상만 남겼다. 나는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갔다. 문틈에 귀를 기울이니, 상무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마라, 회사에서 완전하게 치료해 줄 테니니깐." 금영이는 자기 돈이 안들어가도 치료가 된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는지 입가에 웃음까지 짖는것이 아닌가. 나는 금영을 건물 모퉁이로 끌고갔다. "작업하다 다치면 회사에서 완치될 때까지 치료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공상이 아닌 산재로 처리해라." 그리고 나는 공상과 산재의 차이에 대해 설명햇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시절 일년에 한번씩 산업안전공단에서 공장마다 현장의 안전을 점검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장에 단 한발짝도 들어와 본적이 없다. 왜! 고급술집에서 사장과 점검(?)을 마쳤으니깐. 다음해 나는 구로로 자리를 옮겨 가리봉 사거리의 벌통방과 문래동 마찌꼬바(소규모 영세업체)에 터를 잡았다. 대공장을 뚫기 위해서는 선반과 밀링을 갖고 노는 숙련공을 꿈꾸며. 나는 이사를 하면서 새로 산 헤어드라이를 영배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시절 영배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누나의 사진을 보여주며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녀석들도 벌써 불혹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되었다. 지금은 어디서 고단한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을까. 그때 좀더 노동자 선배로서 녀석들을 챙겼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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