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대빈창 2008. 7. 27. 07:50

 

 

책이름 :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

지은이 : 김병기

펴낸곳 : 학고재

 

책을 덮고 나니 표제의 활자 모양새와 글자체의 농담이 이해된다. 책 이미지를 보면 '진, '을' '아'가 다른 글자보다 흐릿하게 보인다. 그리고 글자체가 정사각형 모양이다. 겉표지의 비석 하단과 인물의 하체가 띠지에 가려 있지만, 비석의 엄청난 크기를 알수 있다. 정식 묘호(廟號)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비'로 불린다. 석비는 고구려 특유의 형태로 개석(蓋石)없이, 대석(臺石)과 비신(碑身)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인들은 통 크게도 높이 6.39m, 무게 37톤이나 나가는 엄청난 자연석 하나로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문은 4면 모두에 사잇줄이 처진 세로로 한 글자 크기가 접시만한 고구려식 예서체로 글자수는 1,775자로 현재는 141자 정도가 마멸되어 판독할 수 없다.

이 석비는 AD 414년 장수왕이 부왕의 공적을 기리기위해 만주 길림성 집안현 통구에 세웠다. 동아시아 고대사의 비밀을 품고있는 '로제타석'이라 할수있는 비는 삼국시대의 정사인 '삼국사기'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서는 고대 동아시아의 역사를 생생하게 알려주는 '돌로 만든 역사서'로서 독보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런데 이 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중·일 삼국의 '100년 전쟁'이 아직도 진행중이다. 나당연합군에 의한 고구려 멸망이후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이 거대한 비석은 잊혀졌다가 1880년대에 재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동안의 '날조된 통설'에 1970년대 최초로 이의를 제기한 이는 재일사학자 이진희였다. 이 땅의 사학은 이병도의 학맥을 이은 실증주의 사학으로 '석회도포'와 '칼금질'로 조작된 비문의 탁본을 실증(?)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꿀먹은 벙어리가 될수밖에 없지 않은가. 현재 탁본에 나와있는 신묘년 기사는 일본 제국 침략전쟁의 정당성의 빌미로 삼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다. 이중 이진희 교수는 래도해파(來渡海破)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하여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는다. 즉 일본참모본부가 이 글자 부분에 석회를 발랐음을 입증하는 증거로 후대로 갈수록 사코본의 글자와 다른 글자의 윤곽이 드러나는 점을 수십 종의 탁본을 비교, 분석하여 증명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의 전공분야인 '서예학'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비문 변조을 증명하고, 사라진 비문의 내용을 복원한다. 그것은 옛 고구려체가 아닌 후대에 급히 석회로 도포하고 글자를 새긴 중국 명조대의 해서체 글씨체였다. 다름아닌 도(渡), 해(海), 파(破)로 변조되기 전의 글자는 입(入), 공(貢), 우(于)였다. 이래야 문장이 살아난다. 장수왕이 부왕의 공적을 후세에 기리기위해 세운 훈적비에 뜬금없이 왜의 공적을 기리는 기사가 튀어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비문을 조작한 일제는 불안한 지 아예 군함을 동원해 비석을 통째 옮기려고 작전을 폈으나 다행히 실패했다. 그리고 '남연서 위서 사건'등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데 광분한 일본 극우 파시즘의 추악함이 폭로되었다. 저자가 20년간 시간을 바쳐 끈질긴 연구 끝에 빛을 본 이 책은 '서예학'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상상도 못할 파렴치한 일제의 극랄한 역사왜곡에 한방의 살인펀치를 날린 것처럼, 시원한 소나기를 맞는 느낌의 책읽기였다. 아무튼 제대로 된 광개토왕비에 대한 최초의 국내 연구서다. 글머리에서 말한 글씨체와 농담은 풍상에 마모된 글씨체를 상징하고, 비문의 글씨는 거의 정사각형 모양이다. 그리고 표제처럼 옛 고구려체는 모든 획을 직선으로 그었다. 일본 군부가 조급하게 비문을 변조하는라고 글씨체를 눈여겨 보지않고 당대 유행했던 해서체로 글자를 바꾸어 날카로운 저자의 눈에 증거를 내민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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